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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 탐구 2부: (30)귀래면 주포리

미륵산에 의탁한 경순왕 자취 서린 곳 최다니엘 기자l승인2011.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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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면은 원주시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지난해 흥업면 매지리에서 귀래면 운계리까지 자동차 전용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꼬불꼬불한 국도를 타고 30~40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원주에서 충주 방면으로 가려면 귀래면을 거쳐야 했는데 도로 개통 이후 특별히 귀래면을 찾는 이가 드물다. 교통 발달로 피해 아닌 피해를 입은 면도 있지만, 그래도 자연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귀래면을 찾는다. 지난 주에는 신라 경순왕의 전설이 살아 있는 귀래면 주포1리를 찾았다. 주포리는 귀래면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운남리, 서쪽으로는 용암리, 남쪽으로는 황산천을 경계로 충북 충주시와 맞닿아 있다. 주포리는 두루 주(周)자와 개울 포(浦)자를 쓴다. 주포리 앞을 흐르는 실개천이 이전에는 남한강 물에 넘쳐 주포리라는 지명을 갖게 됐다고 한다.

   
▲ 미륵산 정상으로 부터 아래로 15m 정도 암벽에 깎아 놓은 불상 미륵불. 튀어나온 코를 만지면 소원이 성취되고 자식을 갖게 된다는 설이 전해진다.

경순왕이 머물렀던 곳 미륵산

귀래(貴來)라는 말은 '귀한 이(손님)가 온다'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신라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이 40년간 머무른 곳이다.

신라는 제37대 왕 선덕왕 이후로 접어들면서 중앙귀족간 왕위쟁탈전과 지방세력가와 하층민의 잦은 반란으로 왕권이 약화됐다. 이 가운데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후고구려가 건국돼 후삼국이 성립됐고, 918년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면서 고려와 후백제간 주도권 다툼이 시작됐다.

927년 경순왕은 왕위에 올랐지만 사직을 보전할 힘이 미약해 왕건에게 나라를 이양하고 명산을 두루 다니다가 용화산(지금의 귀래면 미륵산)에 터를 잡게 된다. 당시 경순왕은 용화산에 학수사라는 절을 지었다고 한다. 학수의 학은 학 '학'(鶴)자를 쓰는데 임금이 아닌 신하의 옷에 '학'자를 새겨놓는 것으로 보아 나라를 이양하고 조용하게 살려고 했던 경순왕의 속내를 짐작케 한다.

학수사는 황산사로 불리기도 했는데 경순왕 당시 임금이 머물렀다고 해서 임금 황(皇)자를 썼지만 조선시대 때 '황(皇)'자를 쓰지 말라는 어명이 있어 황산사(黃山寺)로 개칭됐다. 주포1리 절안마을은 황산사가 있다고 해서 그 후로도 계속 절안마을로 불려지고 있다. 임진왜란 때 황산사가 불타 없어지고 현재는 주춧돌만 남아있다.

   
▲ 미륵산 중턱에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2호로 2.5m 높이의 화려하지 않고 단아한 삼층석탑이 서 있다.
경순왕 제사 지내던 곳

절안마을에서 미륵산 쪽으로 차를 타고 5분 정도 올라가면 경순왕 경천묘가 나온다. 경순왕이 죽자 왕을 추종하던 신하와 불자들이 높은 곳에 암자를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때 영정을 세우고 제사를 지낸 것이 발단이 돼 영정각이 됐다. 이 유래 때문에 지금도 마을사람들은 이 곳을 가리켜 고자암(높은 곳의 암자) 또는 고잠이라 부른다.

세월의 풍화에 쓰러져가는 전각을 조선시대 때 다시 세웠고 이후 영조가 경천묘라는 이름을 지어서 지금까지 경순왕 경천묘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9월9일 경순왕 추향대제가 열리는데 원주시장을 비롯해 각계 인사들이 참가하고 있다.

경천묘 왼편으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등산객과 불자들이 쌓아놓은 돌탑을 만날 수 있다. 미륵불(彌勒佛)이 미래 세계를 다스리는 부처이기에 이승의 어려운 삶에서 죽은 뒤에 극락정토를 바라는 심정적인 갈망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름 산행이라 뜨거운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지만 산새와 다람쥐, 시원한 나무그늘이 어느새 더위를 잊게 한다.

경천묘에서 30분쯤 오르면 조그만 마당안에 세워진 부도탑을 만나게 되는데 학서당, 서응당이라고 한자로 적혀 있다. 승려인 이들은 깊은 불심으로 경순왕을 위로했음을 짐작케 한다. 미륵산을 자주 찾는 등산객들에게는 비교적 완만한 등산로이지만 산을 처음 찾는 이들에게는 다소 가파른 이곳.

부도탑에서 10분쯤 더 올라가면 돌로 된 다리가 나오는데 마을 주민들은 이곳을 해탈교라고 부른다. 영혼이 이탈할 정도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이곳까지 간신히 올라온 것을 떠올리면 기막힌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미륵산까지 동행을 한 주포1리 김윤호 이장은 "이 해탈교는 '속세와 불국토를 연결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해탈교를 지나자 바로 주포리 삼층석탑이 보인다. 자연암반 위에 넓게 깍은 2장의 돌과 그 위에 2단의 굄돌을 놓고 3층 석탑을 세운 것으로, 안내문에는 고려시대 지방사회의 민간신앙 대상물로 만들어졌다고 씌여 있다.
 

   
▲ 절안마을에는 경순왕 경천묘가 있다.
미륵불과 그에 얽힌 전설

3층 석탑을 지나 가파른 경사를 올라가면 멀리서 나마 미륵불이 보인다. 미륵산 정상으로 부터 아래로 15m 정도 높은 암벽에 깎아 놓은 불상이다. 멀리서 보면 두상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결가부좌한 좌상의 형체를 볼 수 있다. 산위에 암벽을 깎아 눈, 코, 입, 귀와 어깨까지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귀가 늘어져 있어 부처의 형상을 담고 있지만 얼핏 보면 옆 동네 아저씨처럼 서민적이고 토속적인 얼굴이다. 얼굴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몸체는 흐릿하게 선만 그려져 있다.

미륵불에는 얽힌 전설도 많다. 경순왕의 공주가 아버지를 위해 부왕의 초상을 이 산 정상 석벽에 조각하고 나중에 경순왕이 직접 보았다고 전해진다. 또 대홍수가 나서 한 불자가 바위에 불상을 새기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물이 급하게 빠져서 불상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미륵불의 튀어나온 코를 만지면 소원이 성취되고 자식을 갖게 된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 미륵산정보화마을에서 운영하는 체험 프로그램, 솟대 체험을 하고 있는 참가자들.
마을소득에 앞장 미륵산 정보화마을

주포1리 마을회관은 2층 규모의 현대적 목조 건축물이다. 1층은 경로당으로, 2층은 마을 정보센터로 활용하고 있다. 주포1리에는 120명 정도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데, 65세 이상 노인들이 많다. 옥수수나 감자, 고추 등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고 있다. 요즘같은 농번기에는 마을회관이 조용하다. 자식들을 시집·장가 보내고 손주 사진을 보며 외로움을 달래는 노인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화투나 바둑, 장기를 하며 황혼을 보내고 있다.

반면 마을회관 2층 정보센터는 활기가 감돈다. 미륵산 정보화마을은 지난 2004년 조성됐다. 주포1리와 주포2리 110가구 240여명의 주민이 절임배추, 감자, 고구마, 옥수수, 건고추, 장뇌삼 등을 인터넷 직거래나 미륵산 정보화마을을 직접 찾는 손님들에게 판매하고 있다. 미륵산 정보화마을이 처음부터 그렇게 활기가 넘쳤던 것은 아니다.

2004년 이후 2009년까지 체험객 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특산품 매출액이 한 해에 100만 원을 넘지 못할 때가 허다했다. 또 홈페이지를 통해서 농산물 거래가 이뤄지는 경우도 극히 적었다. 그랬던 마을이 2010년에는 체험 관광이 177건 증가하고 직거래 장터나 전자상거래를 통한 거래도 급성장했다.

홈페이지 회원 수도 나날이 증가해 3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이러한 눈부신 성장에는 자연과 전통을 결합한 관광 체험 활성화와 도시민의 입맛에 맞춘 전략이 주효했다. 전국적으로 3천여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인터넷 캠핑동호회 '로하스'와 자매결연을 맺어 사시사철 주포리에서 캠핑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솟대만들기, 옥수수따기 체험, 고구마캐기 체험, 짚풀공예 체험 등 농촌의 소박한 정서를 도시민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또한 원주 8경 중 하나인 미륵산 등반도 인기 코스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지난 9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11 국제캠핑산업전시회'에서는 '로하스'와 '미륵산정보화마을' 자매결연 성공사례가 전국의 캠핑 관계자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정보화 마을이 성공을 거두기 이전에는 담배사업이 번성하기도 했으며 금광이 개발돼 금맥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 황산사가 있었던 절안마을

 
주포1리 마을 안녕기원제 서낭당고사

해마다 음력 정월 14일이 되면 주포1리 사람들은 서낭당에 모여 고사를 지낸다. 마을의 수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제주는 고사를 위해 몸과 마음가짐을 바로 해 고사에 참여한다.

언제부터 고사가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김충열 노인회장은 "일제시대 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행사"라고 한다. 그러다 6·25사변 때문에 서낭당 고사를 20~30년 동안 중단했고 이 때문에 마을에 우환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80년대 주포리를 지나가던 한 나그네가 마을 주민 2명에게 "왜 당신네 마을에서는 서낭당 고사를 지내지 않소?"라고 물어보며 마을 주민들과 담소를 나눴다고. 대화를 마치고 30미터 쯤 걸어갔는데 낯선 사람이 마을 고사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히 알고 있어 이를 의아하게 여겨 뒤를 돌아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몇몇 주민들은 이 나그네를 마을을 지키는 신령으로 여기고 있다. 신령이 나타난 뒤 주민들은 무속인을 데려다가 잃어버렸던 서낭당 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무속인이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대를 들고 서낭당 기운이 넘치는 곳을 지목했다. 김충열 회장은 "마을 주민 2명은 내가 아는 사람들인데 그 사건 이후로 마을 고사를 지냈고 이후에는 우환이 생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300년 이상 된 느티나무

주포1리 마을 실개천에는 300년 이상된 느티나무가 있다. 일제시대 때 흉흉한 기운으로 속이 썩어 들어가기도 했지만 마을 주민들에게는 그네를 걸어놓고 선남선녀가 뛰어 놀았던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최다니엘 기자
nice4sh@wonju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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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호(59) 이장

김충열(84) 노인회장

손태호(77) 옹

황산사가 있었던 절안마을(아래). 임진왜란 때 황산사는 불타 없어지고 주춧돌만 남아있다
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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