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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2부: (21)부론면 손곡1리

마을 곳곳에 역사와 예술혼 깃들어 임춘희 기자l승인2010.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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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입구에 쉼터를 만들어 주민이나 지나는 사람이 잠시 쉴 수 있다.
입구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마을 부론면 손곡리. 조선시대 시인 이달 선생이 호를 '손곡(蓀谷)'이라고 짓는 순간부터 이 마을에서는 예술의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던 것일까.

충청북도와 경기도, 강원도 3개도가 만나는 접경지역인 이 마을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손위(遜位)한 뒤 유배를 당해 머물던 곳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손위실(遜位室)이라 불렀고 이를 한자로 적으면서 '위'를 버리고 '손곡'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미에는 오리(五里)라고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폐합시키면서 귀만, 내산동, 신촌, 송정, 서지, 오곡, 백자동, 동정, 평촌을 합해 손곡리로 부르고 있다.

문막방향 49번 국도를 타고 가다 문막 시내를 벗어나 왼쪽 길로 들어서면 궁촌리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나지막한 언덕을 하나 넘어서면 '이곳이 손곡리입니다' 라고 알려주는 듯 임경업장군 추모비와 이달선생의 시비가 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엔 '이달의 꿈'이라고 커다랗게 써 놓은 공연장이 누렇게 물들어 가는 논을 배경으로 서 있다. 맞은편 마을회관을 끼고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돌면 폐교를 활용해 예술인들이 작업실로 사용하는 녹색관광체험수련관이 나온다. 교문에 들어서면 키 큰 밤나무 그늘아래 해바라기 그림이 그려진 의자가 놓여있다.

손곡리의 생명줄인 손곡저수지. 이 저수지에서 마을 논밭에 농수를 대면서 30여 년 손곡리의 문명을 바라보고 있다. 예전엔 밤나무가 마을을 덮고 있어 밤나무골로 부르기도 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논으로 경작하고 있다.

봉황이 알을 낳는 형상 현계산

강원도에 있는 산들이 대부분 뾰족하게 솟아 있는 반면 이 마을을 휘감고 있는 현계산은 봉우리가 평평하고 길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길산'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산이 봉황이 누워있는 형상이라는 전설이 있다. 문막읍과 흥업면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명봉산은 '봉황새 우는 산'이라는 뜻으로 봉황의 머리 부분에 해당되고 충주시 소태면과 원주시 귀래면으로 이어진 미륵산 부분이 몸통, 손곡리는 봉황이 알을 낳는 부위인 꽁지 부분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봉황이 알을 낳는다는 것은 한 나라의 왕이 태어나는 것과 같다'며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마을회관 맞은편 농로에 들어 오른쪽으로 돌면 경운기길 오르막이 시작되고 무덤에 이른다. 무덤 뒤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능선에 올라서면 왼쪽으로 이어진 능선이 이어지는데, 고사리가 지천인 이 산자락엔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지만 이달선생이 은거했던 집터가 있었다고 한다.
 

   
▲ 예술인들이 입주해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녹색관광체험수련관
손곡 이달, 그리고 허균과 허난설헌

이달선생과 그의 제자 허균, 그리고 허난설헌을 보면 예술인의 삶은 결코 평탄치 않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자식이 예술가의 길을 가려고 하면 그렇게 말렸을까.

시인 이달은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벼슬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는 어려서 부터 글을 많이 읽다보니 젊었을 때에 읽지 않은 책이 없었을 정도 였다고. 흔히 방랑시인 김삿갓과 비교하곤 하는데, 김삿갓은 죄인의 자손이라는 죄책감과 할아버지를 비난했다는 부끄러움으로 방황의 길을 택했다면 이달은 서얼 출신이라는 제도의 얽매임 때문에 떠돌이 생활을 했다.

최창경, 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불렸고 이는 당나라 시를 배워 당나라 시보다 더 나은 시를 지은 시인들이라는 뜻이다. 방랑생활 가운데 손곡에서 머물게 된 이달은 허균을 제자로 만난다. 허균의 아버지가 이달을 초빙해 허균 교육을 맡기면서부터 이들의 인연은 시작됐고 허균의 영특함에 매료된 이달은 5년 동안이나 이곳에 머무르며 열정을 다해 가르쳤다. 허균 또한 서자 출신으로 출신성분 때문에 수많은 불이익을 당한다. 허균의 울분과 분노는 최초의 한글소설인 홍길동전을 써 낸 원동력이다. 이달의 제자답게 사회제도의 모순과 정치적 부패상을 질타하고, 정치사회개혁을 주창하는 등 실천적 삶을 살다 정치적인 음해로 목숨을 잃었다.

허균의 누나 허난설헌은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고, 허균과 마찬가지로 이달에게서 시 공부를 했다. 여덟 살부터 시를 지어 신동이라고까지 했지만 열다섯 살에 혼인하면서부터 그녀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남편 김성립은 급제해 관직에 올랐으나 기방을 드나들며 풍류에 빠졌고, 시어머니는 시기와 질투로 그녀를 학대했다. 게다가 어린 남매마저 잃고 뱃속의 아이는 유산했다. 그녀의 친정집에는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허균도 귀양길에 떠나자 그녀는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쓰며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가 결국 27세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그녀는 많은 시를 썼는데 나중에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누이의 시를 보여주면서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발간되는 계기가 되었다.

손곡저수지 옆에는 지금 아담한 공원을 꾸미고 있다. 저수지를 등에 지고 바위 셋이 서 있다. 이제 곧 그 바위엔 이달, 허균, 허난설헌의 시가 새겨진다. 느티나무를 심어 그늘을 만들고 나무 밑에 넓적한 바위 몇 개 놓으면 마을 주민들이나 이 길을 지나는 이들이 잠시 들러 바위위에 새겨진 시를 읽으며 쉴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 되어줄 것이다. 

   
▲ 임경업장군 추모비
임경업장군 추모비와 백두산정계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사들을 막아낸 것은 임경업 장군이었다. 이괄의 난을 평정시켰던 그는 어려서부터 병정놀이를 좋아해 아홉 살이 되면서부터 역서와 병서를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그런 아들에게 아버지는 "어찌하여 너는 장군이 되려느냐"하고 묻자 임경업은 "대장부로서 얼마나 멋지고 통쾌 하오리까"라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너는 장군이 되기는 틀렸다.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니냐"고 하자 어린 아들은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 때 아버지의 말씀을 평생 잊지 않았다는 임경업은 결국 나라를 살리는 명장이 됐다. 53세에 억울하게 죽으면서 "천하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나를 죽이는 것은 큰일을 그르치는 것"이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백두산 정계비가 문제가 된 것은 청나라의 강희제 때이다. 강희제는 만주족의 발상지로서 백두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전국적인 지리지 편찬 사업을 추진하면서 백두산 일대에 대한 자체적인 지리 조사와 더불어 조선에 대해 사계(査界)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위기의식에 지속적으로 거부하다가 1712년에 강희제가 황명으로 이를 요청하자 어쩔수 없이 받아들인다.

1712년(숙종 38) 청나라는 목극동을 사신으로 파견하고, 조선 측에서는 참판 박권이 접반사로 맞이해 의복·조태상과 함께 음력 5월 15일 백두산에 올랐다가 천지에서 내려와 수원을 찾아내고, 산정의 남동쪽으로 4km 지점 분수령에 비를 세운 것이 이 마을 녹색관광체험수련관 마당에 세워진 백두산정계비이다. 지난 1931년 없어졌었지만 최근 같은 크기로 복원해 놓았다.

녹색관광체험수련관에는 서양화가 서용은(55) 씨를 비롯해 서각가, 도예가 등 창작열을 불태우는 작가들이 입주해 있다. 서용은 씨는 "이 마을은 젊은 작가들이 예술의 혼을 받으러 찾아오는 마을"이라며 "발길이 닿는 곳 마다 이달과 허균, 허난설헌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예술극장 '이달의 꿈'에서는 신화마을 예술단이 상설 공연을 펼친다. 지난 2002년 이곳에 정착한 광대패 모두골은 전통연희 예술 활동을 해오면서 지역 주민과 함께하는 마을공동체 삶을 이뤄가고 있다. 이지원 광대패 모두골 대표에 따르면 모두골은 사회문화 예술교육, 손곡학당 운영은 물론 마을 주민의 소득향상을 위한 전통 장 담그기 등 문화예술과 농업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다양한 실험적 활동들을 해오고 있다. 그래서 마을주민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아도 영성을 이어받아 마을 공동체 문화유산을 회복하고, 그 안에서 도시와 농촌이 지속적으로 상생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 '참살기좋은마을' 일환으로 손곡저수지 옆에 공원을 조성 중이다. 9월말 완공  
 

"참 살기 좋은 마을 손곡리로 오세요"

이 마을에서 태어나 지금은 손곡 저수지 근처에서 작은 팬션을 운영하고 있는 운경규(80) 옹은 "한 때 도시에 나가 있었지만 지금 이 마을을 어떻게 도시에 비교할 수 있냐"고 말했다.

"일정시대에 통점에는 15가구 살았었는데 할아버지가 문맹의 설움 겪지 말라고 농사지은 쌀을 팔아서 글방에 보내 줬다. 그런데 어느 날 부론공립초등학교(현 부론초교)에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 입학을 했다. 당시 나이 10살 이었지만 입학연령으로 호적 신고하는 바람에 8살이 돼 2살이 줄었다"고 당시를 회고 했다. 또 "게다(나막신)를 신고 다녔어야 했는데 불편해서 게다를 손에 들고 학교 앞까지 가서 교문에 들어서면 거기서부터 신고 들어갔다"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안타까운 것은 이 마을에도 젊은 사람은 모두 떠나고 65세 이상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조상부터 5대 째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신원균(58) 이장은 "연령대는 높지만 마을주민 화합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라며 "힘을 모아야 하는 일이 생기면 마을 주민 모두가 하나로 뭉친다"며 활짝 웃는다.

이미 10년 전에 예술인 촌을 구성할 때도 그랬고 마을전체를 해바라기와 칸나, 코스모스 같은 꽃길을 조성하며 살기좋은 새농촌 만들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손곡리 정월대보름 달맞이 굿도 이 마을이 이어가고 있는 소박한 축제이며, 신화마을 조성에 이어 올 해는 '참살기좋은마을'을 위해 주민들이 뭉쳤다. 9월 말이면 완공될 손곡 공원엔 식용국화를 심어 개화를 앞두고 있다. 그래서 이 마을 주민들은 도시사람들 부러울 것 없다. 이 마을이 정겹고 자랑스러울 뿐이다.

임춘희 기자  hee@wonjutoday.co.kr

 


임춘희 기자  hee@wonju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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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균 이장

서용은 씨

운경규 옹

양한모 해설사

벼농사가 주업인 손곡리 전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30여 년 전 만들어 놓은 손곡저수지.

'참살기좋은마을' 일환으로 손곡저수지 옆에 공원을 조성 중이다. 9월말 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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