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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2부: (3)호저면 매호리(매화마을)

자연마을을 찾아서 고민교 객원기자l승인2009.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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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호리 전경. 사진 앞쪽에 보이는 인삼밭은 이 마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주민들은 인삼과 담배 등을 재배해 고수익을 올리고 있다.  
 

강원도에서 선정하는 새농촌건설운동 대표모델 마을에 도전장을 낸 호저면 매호리 매화마을로 들어섰다. 지난 4월 매화축제 때는 마을입구부터 매화꽃이 만개해 눈을 즐겁게 하더니 오늘은 한껏 물오른 나무들이 반긴다.

물구리, 상촌, 새목이, 향미 등 4개 자연마을과 5개 반으로 이루어진 매호리는 72가구 200여명이 살고 있다. 1983년 이전까지는 횡성군 서원면에 속해 있었는데,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호저면으로 편입됐다. 이 마을은 농경지가 비옥해 농작물이 잘 자란다.

새농촌건설운동 우수마을로 선정되면서 농촌관광에 힘을 쏟아 지난해에는 2만여명에 달하는 농촌 관광객이 다녀가는 등 도시민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마을이다. 마을 소득수준도 높은 편이다. 지난해 농특산물 판매와 체험학습 운영 등으로 벌어들인 수입이 5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이렇게 부자마을이 된 것은 불과 십여 년 밖에 안됐어요. 그 전에는 다른 시골마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낙후된 농촌에 불과했지요." 2002년부터 이장을 맡고 있는 이하섭(55) 씨의 말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단기간동안 부자마을이 될 수 있었을까? 첫째, 마을주민들의 단단한 응집력에 있지 않나 싶다. 이하섭 이장은 "우리 마을은 부녀회, 노인회, 대동회 등으로 추진단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중요한 사안은 주민총회를 거쳐 의견을 수렴하고 결정합니다. 때문에 총회에서 결정된 의견은 주민들이 모두 잘 따를 수밖에 없지요"라고 비결을 설명했다. 마을을 발전시키기 위한 창구가 하나로 모아져 힘을 발휘하는데 걸림돌이 없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둘째로는 규모가 큰 회사와 자매결연을 체결하면서 관광객이 지속적으로 마을을 방문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마을은 도시철도공사와 자매결연을 체결했지요. 그 직원이 6천500여 명에 달하는데다 광고효과도 높아서 도시철도공사를 통해 체험하러 오는 사람이 연간 1만8천명에 달합니다. 한국을 찾는 중국 관광객들도 매년 2천 명씩 다녀가고 있어요." 주민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노하우가 여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큰 돈 들여 광고하지 않아도 광고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셋째, 다양하고 차별화된 특산품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마을은 매화마을로 유명합니다. 올해로 4회째 매화축제를 개최했지요. 인삼과 담배 재배를 통해서도 고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오리농법으로 쌀을 생산하고 도라지, 더덕, 고사리 등도 심었습니다" 4만여㎡에 심은 매화나무가 5천 그루를 넘는다고 한다.

집집마다 마당에 매화나무 다섯 그루 정도는 기본이고 앞으로도 계속 심을 계획이라고 하니 머지않아 마을 전체가 매화로 뒤덮일 것으로 예상된다. "매화나무를 심게 된 계기는 단순합니다. 1990년도부터 한 두 그루씩 심기 시작했는데, 제가 이장을 맡으면서부터 대대적으로 심기 시작했죠. 다른 마을과 차별화 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습니다." 이하섭 이장의 차별화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

매화축제하면 대부분 남쪽 지방을 떠올리게 되는데, 매년 4월이면 이곳에서도 매화축제가 벌어진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도로 양옆으로 핀 매화가 장관을 이루고,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올해도 대성황을 이뤘다. "마을에 대한 대내외 홍보는 물론 농특산물 직거래를 통한 소득 창출도 많습니다." 일거양득이라는 얘기다.

 

   
 
  ▲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노인들. 이 마을에서 태어났거나 시집와 평생을 이곳에서 살고 있는 분들이다.  
 

항일 고장이자 양반 고장

매화마을은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마을로도 유명하다. 새목 도로변 마을입구에 3.1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때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다 만세를 불렀어. 나도 불렀지" 지금까지도 동네 주민들의 단결력은 손에 꼽을 만하다는 게 박길연(81) 할머니의 말이다. 공출을 피해 15살 때 이웃집 총각에게 시집갔다는 할머니는 빨간 딱지를 다섯 번을 받고서야 시집을 갈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15살짜리가 뭘 알았겠어. 우리 아버지가 공출 안 보내려고 이웃집으로 급하게 시집을 보낸 거지. 우리 집 양반은 군대 가서 5년이나 있다가 왔어. 손가락도 잘리고. 그래서 대통령 훈장도 받았지. 참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어."

17살에 문막에서 시집왔다는 김중열(81) 할머니도 한마디 거드신다. "그때는 여기가 얼마나 산골이었는지 몰라. 저기 저 섬강 말이야. 지금이야 그냥 걸어서도 건너지만 그때는 물도 많고 깊어서 배를 타야 했거든. 가마타고 오다가 노 젓는 배를 갈아타고 들어왔지. 경치 좋고 물 좋고 게다가 양반동네라 그런지 마을 사람들 친분관계가 아주 좋더라고. 나도 금방 적응을 해서 이날까지 살고 있잖아. 효자인 우리 큰 아들네도 같이 살고."

매호리가 산골동네이긴 하지만 섬강이 지척이었기 때문에 먹을거리가 풍부했다. 새들이 군락지를 이룰 정도로 맑은 물이 흐르고 한강의 한 지류이기도 해서 주변농가들은 대부분 친환경 농법으로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마을 뒤쪽으로는 소군산이 떡 하니 버티고 있고, 마을 앞으로는 섬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기 때문에 풍수지리학적으로 매우 좋은 위치라고 한다.

   
 
  ▲ 매화축제 때 사용하는 마차.  
 

 그 때문인지 이 마을은 유독 박사가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산새가 좋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박사가 11명이나 나왔는데, 이학박사나 공학박사 쪽이 대부분이야. 상촌에는 원주 이씨가 많이 살았고, 물구리에는 전주 이씨들이 많았지. 새목은 창녕 성씨들 집성촌이었고, 향미에는 은진 송씨들이 많이 살았어. 나는 원주 이씨 은사공파 14대 손이지"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는 이명섭(75) 할아버지의 말이다.

지금도 대부분 이들 후손들이 살고 있고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6.25때 전소된 마을을 주민들이 다시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아직도 옛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우리 마을에도 중공군들이 들어왔었어. 피난 간 사람들도 있고, 남아 있었던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우리 아버지와 소군산 굴속에 숨어 있었거든. 그런데 중공

   
 
  ▲ 체험관 얖에 설치돼 있는 물레방아.  
 

군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굴속까지 찾아 왔더라고. 이제 죽었구나 싶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한자를 써서 중공군과 얘기를 나누시는 바람에 살았어. 굴속에서 나와서 마을로 오니까 북한 군인들이 있었는데 심부름만 시키고 그대로 놔두더군. 퇴각할 때도 우리는 별일 없이 마을에 남을 수 있었어"

집이 불타버린 것은 오히려 미군 폭격기에 의해서라고 한다. 폐허가 된 마을을 다시 일구고 살다가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무렵에 지금의 도로가 생겼다. 그때 지붕도 슬레이트로 개량했는데 집을 헐고 새로 지은 것은 최근의 일이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불과 십여 년 안팎으로 집을 새로 지은 이유는 역시 소득과 무관하지 않다.
 

   
 
  ▲ 녹색농촌체험관.  
 

효자마을

이 마을의 또 하나 자랑거리는 효자비다. 매호리 노인회관에서 소군산 등산로를 따라 걸어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밭 한가운데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1949년 세워졌으니까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다.

"나도 효자비 세우는 걸 봤지요. 그런데 나라에서 세워준 건지 개인이 세운건지 정확히 모르겠어. 처음에 세운 것이 오래되었는지 한 번 더 세운 건 확실해" 김순덕(80) 할머니의 얘기다. 한 칸짜리 맛배지붕으로 깔끔한 것을 보니 할머니의 말씀처럼 새로 단장한 듯 보인다. 

 

 

 

1919년 3월 12, 13일 만세운동 전개
"밤새워 만세를 불렀다"

1919년 3월 12일, 13일 양일간 이 마을 사람이었던 송병기, 박민희, 이종우, 이정헌, 성태현, 유정근, 이두연, 김옥봉 등이 주축이 되어 4개 마을을 순회하며 만세운동을 했다. 당시는 행정구역상 횡성군 서원면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횡성 만세운동 역사에 기록돼 있다.

처음 만세운동을 계획한 것은 향미에 살던 송병기, 성태현, 박민희, 이정헌이었고 이들이 향미에 살던 주민 50여명과 함께 향미와 수동 사이 동산 위에 올라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밤새워 만세를 불렀기 때문에 강원도장관의 보고에는 1919년 4월 12일에, 헌병사령관의 보고에는 4월 13일에 만세를 부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만세운동으로 인하여 징역을 살고 온 사람은 주동급 8명인데, 김옥봉은 행방불명되었고, 성태현, 박민희, 이정현은 후손이 없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3월 1일 기념비가 건립됐다.

 

 

상촌마을 밭 한가운데 효자문 비각이 세워져 있다. 1949년 청주김씨 김병근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김병근은 어머니가 병으로 눕게 되자 뒤뜰에 단(壇)을 만들어 놓고 주야로 어머니 병환이 낫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어느 날 새 한 마리가 물그릇에 알약을 떨어뜨려 그것을 어머니께 드렸더니 신기하게도 병환이 나았다고 한다.

고민교 객원기자

김병근(金炳根) 효자문

   
 
     
 

 


고민교 객원기자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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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매호리 전경. 사진 앞쪽에 보이는 인삼밭은 이 마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주민들은 인삼과 담배 등을 재배해 고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노인들. 이 마을에서 태어났거나 시집와 평생을 이곳에서 살고 있는 분들이다.

녹색농촌체험관.

체험관 얖에 설치돼 있는 물레방아.

매화축제 때 사용하는 마차.


1919년 만세운동을 기념해 1989년 세운 3.1만세운동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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