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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2부: (2)신림면 용암2리 용소막 마을

자연마을을 찾아서 고민교 객원기자l승인2009.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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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소막 성당으로 잘 알려진 용소박 마을 전경. 사진 중앙에 보이는 뾰족한 건물이 용소막 성당이다.  
 

마을주민 대다수가 천주교 신자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병인년 박해를 피해 용소막마을로 숨어들었던 천주인들의 마음속에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을 거라고 생각하며 용암교를 건넌다. 여기서부터 도로를 따라 마을회관까지 용소막 1반과 2반을 용소막 마을이라고 부른다.

용소막이라는 말은 용소(龍沼)라는 큰 못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는 실제로 큰 연못이 있었어요. 그런데 농지정리를 하면서 농지로 개간해 지금은 볼 수 없어요." 8년 동안 마을이장을 지냈던 지경식(56) 씨의 증언이다. 마을의 지형지세가 용의 형상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용소막 마을은 용소막성당으로 더 유명하다. 언제부터 용소막이라는 말이 전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산골촌락이었던 이곳이 천주교 교우촌을 형성하면서 알려졌기 때문이다. 대대로 살아왔던 토박이 주민들은 천주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외지로 나갔고, 개종했거나 눌러 살았던 사람들도 100년이 지난 지금은 모두 죽고 없다. 토박이 주민들의 흔적을 수소문했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 얘기와 2002년 발행된 '용소막 본당 100년사'에 따르면 천주인들이 이주해 오기 전에도 마을이 형성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성당 건립에 큰 역할을 했던 최씨 일가와 심씨, 백씨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지만 옛날처럼 많지는 않고, 새로 유입된 인구가 마을주민의 절반정도 된다고 한다.

50여가구가 살고 있는데 30% 정도가 65세 이상 노인들이다. "마을주민 대부분이 성당 신자들로 성당일이 마을일이고, 마을일이 성당일이예요. 마을과 성당을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 없지요. 농사짓는 사람들이 70~75%정도 되고, 나머지는 철도공무원이거나 귀농한 사람들이죠." 지경식 씨의 말이다.
 
박해 피해 정착한 천주인들

 

 
 
 

계단 턱에 새겨져 있는 글씨로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받던 당시에 새겼던 것으로 보인다.

 
 
   
 
  용소막 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마을과 관련한 자료들을 잘 보관하고 있는 편이다. 사진은 마을 역사를 모아 놓은 자료들  
 

 고종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가톨릭을 탄압했다. 1866년에 시작된 박해는 병인양요,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을 거치면서 더욱 치열해지다가 1873년 대원군이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끝났다.

박해를 피해 숨어 다녔던 천주인들이 정착할 곳을 찾다가 용소막에 이른 것으로 보여진다. 용소막과 거리가 멀지 않는 곳인 쇠골과 거무내 등지에도 이미 박해를 피해 교우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산을 이용해 화전을 일구고, 옹기가마터를 만들어 옹기를 팔아 생활했다. 또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우들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용소막에 성당이 생기고 나서부터 마을은 번성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용소막으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외국신부님이 계셨던 곳이라 일본인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역이었죠. 일본인들의 핍박과 수탈을 피해 이주한 사람들은 성당을 일종의 바람막이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현재 용소막성당 주임신부인 위종우 신부의 말이다.

이후 6.25를 겪으면서 인구가 많이 줄었다가 성당 구호사업으로 다시 인구가 유입되었다. 구호가 끊기면서 또다시 인구가 줄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위종우 주임신부는 "옛날보다 인구가 많이 줄었다고 들었습니다. 성당주변의 90% 이상이 신자로, 마을의 큰일이나 행사가 있으면 성당 마당에서 마을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당 땅의 일부를 마을에 기증해서 운동시설과 놀이터를 만들어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습니다"라며 마을주민들과의 친화력을 강조했다.
 
농촌관광 마을로 고소득 올려

번성기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골마을에 불과하다. 하지만 2001년 친환경우수마을, 2002년 새농촌 건설운동 우수마을, 양질미 생산 우수마을, 2005년 농촌관광체험마을, 2007년 건강장수마을로 선정되면서 원주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용소막 오리쌀, 용소막 마늘, 용소막 신선초 등 자체브랜드로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한다. 평범한 농촌에서 친환경마을의 대표주자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것은 용소막성당이라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있기에 가능했다. 성당이 주축이 돼 농산물 판로를 안정적으로 구축해 줬기 때문이다.

또한 성지순례를 오는 천주교인들과 용소막성당을 보기 위해 오는 관광객이 많아 이들이 구입하는 농산물이 적지 않다. 다양한 농촌 체험장 운영도 관광객 유치에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 "작년에는 기차투어로 700명이 한꺼번에 온 적이 있어요. 송어, 우렁이, 메기 체험장. 장 담그기 체험장 등 집집마다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어요." 지경식 씨의 마을자랑이다. 주말농장도 운영하기 때문에 도시민들이 꾸준히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마을 안쪽에는 배꽃이 만발해 달빛보다 하얗게 마을을 감싸는 배나무 체험장이 눈길을 끌었다. 

   
 
  ▲ 다양한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용소막 마을. 사진은 배꽃이 만발한 배나무 체험장.  
 

형기(74) 옹이 기억하는 용소막

   
 
     
 

이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고 있다네. 마을 모습도 그동안 많이 변했지 그럼. 옛날에는 초가집 밖에 없 었는데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꾼 것이 70년대쯤 이었을 거야. 우리 며느리 시집올 때만 해도 징검다리 건너서 마을로 들어왔는데 지금은 저렇게 넓은 다리가 있잖아. 흙 부뚜막에 돌담도 쌓고 입식으로 잘 고쳐 놨더니 우리 집 구경 온 사람들이 꽤 있었어. 그땐 사는 맛이 났는데…. 지금은 하도 잘 지은 집들이 많아서 우리 집은 볼품없는 옛집이지 뭐.

우리 마을은 다른 마을하고는 좀 다르지. 다른 마을에서는 서당 훈장님에게 한문도 배우 고 예절도 배울 때 우리 마을사람들은 성당에 다니면서 새로운 문물을 많이 받아들였던 게야. 외국신부님들이 계속 오셨으니까. 산골마을에서 외국사람 구경이나 할 수 있었겠어. 그래서 우리 마을사람들은 좀 일찍 깨인 편이지. 하지만 영어를 직접 가르쳐주지는 않았어. 아일랜드 신부님들이 많이 오셨었는데 주임신부님으로 4년 정도 계시면 임기가 만료돼 본국으로 돌아가거든. 나야 부모님 뒤를 이어 성당에 다녔으니까 성당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살았지. 그거야 뭐 지금도 그렇고.

6.25 터질 때 내 나이가 15살이었어. 피난 갔다가 돌아와 보니까 성당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더라고. 공산군 창고로 쓰였다고 하더군. 성당 꼭대기에다 적십자 깃발을 매달아 놔서 폭격을 피했다고도 하고, 성당 옆에 있는 나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에 총 맞은 자국이 아직 남아있는 곳도 있어. 피난을 두 번이나 나갔다 돌아와서 참 배가 많이 고팠지. 농사지을 것도 없을 시기였으니까. 칡뿌리 캐먹고, 소나무 껍질 벗겨먹고, 나물죽 숱하게 먹었네.

그런데 성당이 참 고마웠어. 외국신부님들이 본국에 말해서 밀가루나 옥수수가루, 우유 같은 물품을 많이 나눠줬거든. 다른 마을에 비하면 천국이었던 셈이지. 그 덕에 아주 큰 고생은 면했어. 그때는 성당이 우리의 모든 것이었지.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었는데 원조가 끊기니까 썰물처럼 빠져나가더라고

 

   
 
  ▲ 용소막 마을은 용소막성당이 생긴 후부터 지금까지 주민들 대다수가 천주교 신자들이어서 용소막 마을 역사는 용소막성당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은 1050년대 중반 신부들과 주민들이 찍은 단체사진.  
 

용소막성당과 함께한 105년 역사

용암리에 위치한 용소막성당은 강원도에서 세번째 설립된 성당으로 1986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된 벽돌조 성당이다.

병인박해를 겪었던 제천사람 최도철이 1898년 용소막에 원주성당 소속 공소를 개설했고, 1904년 원주본당에서 분리되면서 독립된 성당이 되었다. 십여 칸의 초가였다가 1914년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해 신축공사를 하기 시작, 1915년 건평 100평의 벽돌 양옥성당을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한국전쟁 시 일부 파손된 것을 보수했다고 한다.

발족 당시 860여명이었던 신자 수가 1910년에는 2천명, 1915년 3천명으로 증가했으나 1952년에는 300여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용소막성당 100주년을 맞은 2004년에는 870여명의 신자들이 교적에 올라있다고 하는데, 발족 당시의 신자수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제1대 프와요 신부를 시작으로 제35대 위종우 신부가 주임신부로 재직 중이다.

용소막성당은 천주교 신자들의 성지순례 코스로 유명하며 원주시가 원주8경으로 선저했을 만큼 경관이 아름다워 연중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고민교 객원기자

 


고민교 객원기자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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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소막 성당으로 잘 알려진 용소박 마을 전경. 사진 중앙에 보이는 뾰족한 건물이 용소막 성당이다.

계단 턱에 새겨져 있는 글씨로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받던 당시에 새겼던 것으로 보인다.

용소막 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 마을과 관련한 자료들을 잘 보관하고 있는 편이다. 사진은 마을 역사를 모아 놓은 자료들

용소막 마을은 용소막성당이 생긴 후부터 지금까지 주민들 대다수가 천주교 신자들이어서 용소막 마을 역사는 용소막성당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은 1050년대 중반 신부들과 주민들이 찍은 단체사진.


다양한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용소막 마을. 사진은 배꽃이 만발한 배나무 체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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