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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2부: (29)부론면 법천1·2리

"삼도가 만나는 곳, 정치·경제 활발" 최다니엘 기자l승인2011.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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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막읍에서 섬강 강둑을 따라가다가 영동고속도로 밑을 지나 49번 국도를 타고 30분 가량 가면 부론면 법천리가 나온다.

법천리(法泉理)라는 지명은 통일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창건한 법천사(法泉寺)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이가 많다. 불법(佛法)이 샘(泉) 솟아 온 세상을 촉촉하게 적셔 준다는 절 이름처럼 법천리를 탐방한 지난달 28일에도 단비가 내렸다.

법천2리 마을회관에 들어서니 얼핏 60~70세 가량으로 보이는 할머니들이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법천2리는 지난 5월 말 현재 81세대, 162명이 살고 있다. 대부분 65세 이상 노인들로, 할아버지는 별로 없고 할머니들이 많다. 마을회관에 모인 할머니들은 아들, 딸, 손자, 손녀가 있지만 짐이 되기 싫어 따로 살고 있다고 한다.

노부부가 같이 사는 경우는 그나마 나은 경우지만 배우자가 세상을 떠난 독거노인도 많아 마을회관에는 독거노인 10~12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각자의 집에서 혼자 살 때는 외롭고 무기력해져 우울증에 빠지기 쉬웠지만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살면서부터 항상 맛있는 음식 냄새와 대화로 가득 해 사람사는 것 같다고 한다.

   
▲ 현재의 남한강대교 바로 밑에 나루터가 있었다. 일제시대에 이곳에서 배를 타고 충주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강원도·충청북도·경기도가 만나는 삼도 경계지역

부론면 법천리 노인들이 즐기는 농담 중 "담배 한 대 물고 삼도를 둘러본다"는 말이 있다. 섬강을 경계로 400m 가량 되는 남한강대교를 건너가면 충청북도 앙성면 단암리가 나오고, 흥원창을 둘러싼 자산을 넘으면 경기도 여주에 이른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나룻배를 타고 다녔다. 섬강은 발원지인 강원도 평창에서 시작되어 원주 부론면에 이르러 남한강과 합류해 서해바다로 빠져나간다. 조선시대 영월, 평창에 사는 사람들이 한양을 가기 위해 또는 충주, 단양 주민들이 남한강을 따라 경기도로 가기 위해서 이 뱃길을 유용하게 이용했다. 삼도가 만나다 보니 법천리에는 자연스럽게 사람이 많이 모이고, 가구 수가 많은 부호 마을이 됐다.

그래서 '말이 많이 오가는 곳'이란 부론의 뜻 외에도 일설에는 부자 부(富), 의론 론(論)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말에 3대 판서(判書)가 부론면에 거주할 정도로 정사(政事)에 풍부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고을 원이나 감사가 이 사람들의 조언을 들으며 정치를 했다고 한다.

뱃길이 발달하다 보니 법천리 주민들은 아직도 나룻배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법천리 나루터는 남한강대교 바로 밑에 있었다. 일제시대에 뱃삯을 주고 충주로 건너가 소풍을 즐겼다는 노태호 법천2리 전 노인회장은 "한 반에 50~60명의 학생들이 괴나리 봇짐을 지고 조그만 나룻배를 타고 가는데 그 당시에는 즐거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전했다.

6·25 전쟁 뒤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부산까지 피난을 가야 했던 1·4후퇴 당시에도 마을사람들은 이 뱃길을 피난길로 썼다고 말했다. 고려시대 12조창 중 하나였던 흥원창이 부론면 흥호리에 위치했던 이유도 각지에서 올라오는 조세물품을 한양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였다고 하니 여러모로 유용했던 것.
 

   
▲ 대장간, 숯가마골, 나루터, 장터가 있어 경제가 활발했던 개치마을
정치·경제가 활발했던 '개치'

부론면사무소가 위치해 있는 법천리 1449번지 인근은 1950년 이전에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다고 전해진다. 노인들은 이곳을 아직도 '개치'라고 부른다. 예전 사람들은 강이나 내에 물이 드나드는 곳을 '개'라고 했고 고개나 언덕을 '치'라고 불렀는데 부론면사무소에서 얼마 가지 않은 남한강대교에 나루터가 있었고 그 언덕에 10여채 집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흥원창을 중심으로 발전했지만 1936년 병자년 때 대 홍수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당시 열렸던 시장이 현재 부론면사무소 인근 개치로 이전했다. 개치에는 당시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대장간이 여러개 있었고 노상에서 음식을 파는 노점이 즐비했다고 한다.

   
▲ 나무로 숯을 피우고 그 열로 토기 그릇을 만들었던 숯가마골
5일장이 열리면 농악패와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졌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개치에서도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운동에 동참했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또한 개치는 일제시대 때 목화와 양귀비를 기르던 곳이기도 하다. 마을사람들이 목화와 양귀비를 재배하면 일본 순사들이 찾아와 주민들이 사용할 분량만 남겨두고 모두 빼앗아갔다. 때문에 주민들은 땅을 깊이 파 목화를 숨겨두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마을주민들은 모두 개치로 몰려나와 만세를 외쳤다. 나라를 다시 찾은 감격이 그 이듬 해까지 이어져 손에서 일을 내려놔 농사짓는 사람이 얼마 안됐었다고 한다. 반면에 현재 남한강대교 인근에 작은 산에는 일본 신사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몰려가 불로 사르고 그 재까지 없애버렸다고 하니 당시 핍박과 시름이 어느 정도 였는지 짐작이 간다.

개치 인근에는 숯가마골도 있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 숯을 피우고 그 열로 토기 그릇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1950년 이전에는 농업이 주업이었음을 감안하면 대장간, 숯가마골, 나루터, 장터가 있었던 개치는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지. 지광국사의 부도를 모셨던 탑전지가 남아있다.

   
▲ 고려 선종 때 세운 4.5m 높이의 지광국사탑비
고려시대 번성했던 법천사

법천사는 고려 중기의 대표적인 법상종(法相宗) 사찰로 명봉상 자락에 위치해 있다. 마을 사람 아무나 붙잡고 법천사지 위치를 물으면 바로 대답할 정도로 법천사지는 마을 주민들에게 소중하고 친숙한 곳이다.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에게는 역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유년시절 놀이터나 학창시절 수학여행지로 기억된다.

이 곳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해 지광국사탑비와 법당터, 석탑의 일부 등이 남아 있으며 주변에는 절터에서 나온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신라하대 이 지역의 대표적 사원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려시대에는 문벌 귀족의 후원을 받아 번성한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관웅, 지광국사, 정현, 덕겸, 관오, 각관 등 유명한 승려가 있었고 지금도 법천사지 절터 윗 부분에는 지광국사탑비가 자태를 뽐내고 있다. 법천사지가 얼마나 큰 절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법천리에는 아직도 장뜰이라는 곳이 있는데 법천사지에 있는 승려나 신도들이 장독을 묻은 곳이라 해서 마을 이름이 장뜰이다.

지광국사탑비는 고려 선종(1085년) 때 세운 것으로 높이는 4.5m 정도 된다. 돌거북이 고개를 쳐들고 탑비를 받쳐 들고 있는데 당당한 기풍에 한 번 놀라고 정교한 조각 솜씨에 한 번 더 감탄하게 한다. 비 옆으로는 용 두 마리가 하늘로 치솟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여의주가 빛을 발하고 있다. 1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조각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정교하다. 법천리 주민들에게는 자랑거리이자 보물이지만 몇 해 전 벼락을 맡고 일부가 훼손돼 주민들은 이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법천사지 서원, 과거시험 준비한 곳

조선시대에는 유방선이란 학자가 법천사지에 머물며 한명회, 서거정, 권람 등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마을주민들은 법천사지 앞터를 서원이라고 부르는데 서원은 지금의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이었다.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 수백 명의 응시자들이 법천사지에 들러 숙식을 해결하고 명봉산의 자연을 벗 삼아 과거시험을 준비했다.

또한 장뜰이라고 불리는 도시랭이 터도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정진하거나 과거를 준비하던 곳이다. 법천리 마을 북쪽에는 홍문관 직제비가 있는데 법천리 주민 중 정씨 일가가 선대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 알려져 있다.

신선들이 바둑 두고 놀았던 수영봉 마을

수영봉산은 수영봉 마을에 있는 219m 높이의 작은 산을 말한다. 신선들이 와서 바둑을 두고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앞 산에는 임경업 장군의 조부 묘소가 있을 정도로 기가 세다. 수영봉 마을은 또한 무속신앙이 활발했던 곳이기도 하다.

오래된 느티나무에 서낭당을 만들고 마을의 길흉화복을 점치거나 무사안녕을 기원했던 곳이었다. 진한민 노인회장은 "의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을 때, 마을사람들이 중병에 걸리면 무당에게 찾아가기도 했는데 무당이 보통 냉수 한 사발을 내밀며 특효약이라고 말했던 장면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최다니엘 기자
nice4sh@wonju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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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민 옹

김양옥 옹

임순상 옹

노태호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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