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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2부: (25)지정면 안창1리(월운·능촌·흥법마을)

가는 곳 마다 역사의 흔적 그대로 남아 임춘희 기자l승인201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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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에 살던 한 선비가 깎아지른 듯한 이 바위에 올라가 한양으로 올라가던 원님에게 하고싶은 말과 욕을 실컷 해 주었다고 해서 이 바위는 '욕바위'로 불린다.

지정면 안창리는 문화유산의 마을이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는 마을이다. 마을 곳곳 가는 곳 마다 오랜 역사의 흔적을 쉽게 만날 수 있어 역사의 기운이 마을을 휘감아 두르고 있는 듯 하다.

선조의 계비(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인 인목대비가 태어났고 연흥부원군의 묘와 사당, 신도비, 흥법사지와 같은 유서 깊은 유적이 있는 안창1리는 지정면 남단에 위치해 월운동, 능촌, 흥법  세 개 마을로 이뤄졌다. 동쪽으로는 간현리가 있고 남서쪽으로 문막 동화리와 취병리, 북쪽으로는 판대리와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에 한양으로 올라가는 교통 요지이기도 했던 이 마을엔 역군들이 말을 바꿔 타거나 말의 휴식처로 사용했던 역말(안창역)이 있었다고 한다.

안창 역은 을미사변시 을미의 병사를 일으킨 장소이기도 하며, 산이 높고 골이 깊은데 골을 따라 계곡물이 흐르고 있고 산새가 수려한 이곳은 욕바위, 중다래미바위, 선녀바위와 같은 바위와 얽힌 사연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월운(月雲)마을 김인기(71) 노인 회장은 "지정면에 달이 뜨면 제일 먼저 보이는 장소가 이 마을이라고 해서 '월운'이라 부르게 된 유래가 있다"고 전했고, 이기성(75) 전 면장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언론이 시작돼 '언론'이 '월운'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지도에는 언론리(言論里)라 적혀 있어 우리말인 어룬, 어루니가 먼저 생기고 한자어로 정착된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현재 400여 명 주민이 안창리 전역에 살고 있으며 주 농산물은 쌀, 인삼, 오이이고 부업으로 일부 농가에서 토종꿀을 생산한다. 이 마을 주민들은 예전부터 정이 돈독할 뿐 아니라 생활력이 강하고 근면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실하게 일하고 배움도 중요시 여겨 예전부터 학력이 높았다고 한다.

다른 농촌과 마찬가지도 평균연령은 점점 높아 고령화가 되고 있지만 타 지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고 있는 것을 보면 살기 좋은 마을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경기도에서 20여 년간 살다가 이 마을에 들어와 4년 정도 살고 있다는 하계민(71) 옹은 "자연환경만 좋은 것이 아니라 인심도 넘치는 마을이라서 벌써 정이 푹 들었다"며 "여생을 이곳에서 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목대비와 김제남

   
▲ 김제남 신도비와 수령 500년 느티나무,

안창리에는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仁穆王后)와 그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어 당시 그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말해주고 있다. 월운마을에서 능촌으로 향하는 큰길가에 인목대비 생가와 김제남 사당인 의민공사우가 있다.

이 사당은 건립되고 두 차례나 화재를 당했는데 1965년 사우를 건립했고 1997년에 신축했다. 도로변에서 30m가량 떨어진 곳에 김제남 묘소가 있으며, 마을주민들이 수령 500년으로 추측하는 거목 느티나무 아래 김제남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의민공사우와 인목대비 생가 근처에는 당시 식수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맑은 물이 솟아나고 있다.

김제남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해 연천 현감을 거쳐 1601년 그의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가 됨으로써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이 됐다. 이후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려 한다는 이이첨의 모함으로 서소문(西小門) 밖 자택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의 세 아들도 이 일로 인해 화를 입었는데 다행히 자부(子婦)와 손자 천석, 군석 형제는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한양에서는 살 수가 없게 되었고 자부는 이들이 급사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관속에 넣어 선영인 원주까지 피신시킨 후, 외조부 정묵이 치악산 영원사 주지에게 부탁해 영원사에서 10년 동안 남의 눈을 피해 살 수 있었다.

그 후 천석은 인조반정으로 대왕대비가 된 인목대비의 부름을 받고 돈영부 참봉을 거쳐 홍천, 금성에서 수령까지 역임했다. 그러나 동생인 군석의 행방은 알 수 없으며 천석은 사후에 안창리에 묻혔다.

1616년 인목대비가 폐비되자 그도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가 인조반정 후 관직이 복구되고 왕명으로 사당과 신도비를 이 마을에 세우게 된 것. (▷부관참시: 이미 사망한 사람이 사망 후에 큰 죄가 드러났을 때 처하는 극형. ▷인조반정: 광해군 15년, 서인 일부가 광해군 및 집권당의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종(倧: 인조)을 왕으로 세운 정변.)


   
▲ 흥법사지에 있는 진공대사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365호).
 
흥법사지

앞에는 섬강이 흐르고 영봉산이 뒤를 감싸고 있는 흥법사지에는 흥법사 빈터 위에 흥법사지삼층석탑(보물 제464호)과 진공대사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365호)가 세월의 흔적을 안고 서 있다.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흥법사는 '원주 3대 폐사지'의 하나로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진공대사가 고려 태조의 왕사로 신임을 받으며 번창했던 고려 불교 성지였다.

기록에 의하면 흥법사지는 통일신라 말 사찰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건물터를 살펴보면 탑의 동쪽 10m 지점 축대위에 중문(中門)으로 보이는 터가 있고, 탑 앞 서쪽에 절 중심 건물인 금당(金堂)으로 보이는 터가 있다. 또 주변에 여러 건물터와 샘이 있고 북동쪽 산기슭에는 진공대사탑을 모셨던 자리가 남아 있다.

'진공대사탑비 귀부 및 이수'는 왕건의 스승 진공대사를 기리는 유물이다. 이 탑비는 태조가 직접 지은 글(비문)에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가려 뽑아 새긴 왕희지체(王羲之體)라고 전하고 있다. 비의 받침 부분인 귀부는 원형이 잘 보존돼 있는데 대담해 보이는 조각과 깊게 새긴 귀수의 운룡(雲龍)이 화려하다. 귀부의 머리는 직립한 용두형(龍頭形)으로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목은 짧고 용린(龍鱗)이 있으며 네발은 대석을 힘있게 딛고 있다.

아쉽게도 비의 본체는 파손돼 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으며, 신라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초기의 역동적이고 패기가 넘치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흥법사지 진공대사탑과 석관은 지금은 경복궁에 있다.

수수한 멋을 간직한 삼층석탑은 흥법사지 가운데에 서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이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두고, 그 위로 기와집 모습을 본뜬 듯한 탑신(塔身)을 3층으로 쌓아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3개씩 새겨져 있는데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기 드물게 중앙에는 1층 몸돌을 괴기 위한 받침을 3단으로 조각했다. 지붕돌은 두껍고 경사가 가파르며, 아래받침은 얇게 4단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파손된 부분이 많다. 머리 부분에는 노반(露盤)이 머리장식을 바치고 있다.

흥법사지 주변에는 문헌에 기록된 대로 절에서 승려들이 쓰던 우물 '승천(僧泉)'이 3개 있다. 진공대사탑비 옆 퇴락한 집 뒷마당에 있었던 우물은 몇 해 전에 인삼밭으로 변했고, 밤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는 우물은 주변을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아 잘 보존돼 있는 편이지만 안타깝게도 물이 말라있는 상태이다. 뒷산 쪽에 있는 우물 승천은 한 겨울에도 얼어붙지 않고 물이 흐른다. 그 중 오른쪽 골짜기에 있는 우물은 물 깊이도 제법 깊고 단정하게 잘 손질돼 있다. 그 우물은 푸른색의 돌이 바닥에 깔려 있고 그 돌에는 흥법사 뒷산인 영봉산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한다.

애국심으로 일어난 의병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왕후를 시해한 일제와 단발령에 항거한 을미의병활동의 효시가 된 거사가 이 마을 안창역에서 일어났다. 이 의거를 기념해 세운 비가 욕바위와 김제남 사당 사이에 세워져 있다.

1896년 1월 12일(을미년 11월 28일), 의병 모집 책임자인 소모장 진사 김사정은 김제남의 10대손인이다. 의병들이 원주관아를 점령하면서 안창리 의거가 일어나자 춘천, 안동 등 전국 각지에서 이어 의병이 일어났고 제천을 거점으로 의병진은 단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포군들이 영남 지역으로 흩어졌다.

부론과 신림을 거쳐 제천으로 들어간 의병부대는 평창 방림에서 해산됐으며 의암 유인석 등 일부 유생들은 만주로 망명해 훗날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 전설 속 선녀들이 목욕을 하던 장소. 원 사진은 선녀들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다가 산신의 노여움을 사 거꾸로 매달린 스님 모습의 바위.

'욕바위' 전설을 아시나요?

덕가산 골짜기에는 재미있는 전설을 담고 있는 바위들이 시리즈로 소개해도 될 정도로 많이 있다. 포도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쳐다보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욕바위'가 오후 햇살을 길게 받고 있었다.

옛날 이 마을에는 성질이 괴팍한 선비가 있었는데 새로 부임해온 원주 목사에 대해 늘 못마땅한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상대가 원님인지라 겉으로 욕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원님이 한양으로 영전돼 간다는 소식을 알게 돼 어떻게든 원님에게 실컷 욕을 해 줘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원님이 지나갈만한 길 옆 높은 바위 벼랑에 올라가 원님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원님이 수행원들과 함께 가까이 다가오자 선비는 바위위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 댔다. 듣다 못한 원님이 노발대발하며 선비를 잡아오라고 명했지만, 까마득한 바위를 쳐다만 볼 뿐 어찌할 수가 없었다. 갈 길이 바빴던 원님은 할 수 없이 그냥 그곳을 지나갔고 그 후부터 이 바위를 욕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욕바위 맞은편 쪽으로는 골짜기 아래로 물이 흐른다. 이곳엔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선녀가 있었다고 한다. 산신을 만나기 위해 오는 그 선녀는 언제나 바위 밑에 흐르는 맑은 물에서 목욕을 하곤 했는데, 이런 기미를 알아챈 장난기 많은 스님이 선녀가 목욕을 할 때마다 층암절벽을 오르내리며 선녀가 벗어 놓은 옷을 숨기거나 돌을 던져 물방울을 튀기는 장난을 쳤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산신은 진노해서 주문을 외워 스님 몸을 꽁꽁 묶어 벼랑에 거꾸로 매달아 버렸다. 그 뒤 세월이 흐르면서 스님 몸은 점점 굳어져 그만 바위가 됐는데 후세 사람들은 중을 달아맨 바위라고 하여 '중다래미바위'라 불렀다. 신기하게도 머리를 빡빡 깎은 스님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처럼 생긴 바위가 지금도 뚜렷하게 보인다.

굴 입구에는 강추위가 오면 세 갈래로 얼음이 얼어 4월 중순까지도 녹지 않는다. 이 세 갈래 얼음은 강원도와 경기도, 충청도를 뜻하고 가장 두껍게 얼어서 늦게 녹는 쪽 지방에 그 해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복합문화예술공간 '살구나무예술촌(대표: 박전하)'이 폐교에 정착해 농촌의 문화소외를 보듬고 있다.

복합문화공간 살구나무예술촌

월운마을과 능촌 갈림길에 있는 구 안창분교에는 지난해 복합문화공간 '살구나무예술촌(대표: 박전하)'이 자리잡았다. 이곳에선 문화적으로 소외된 농촌지역 주민들을 위한 공연이 기획돼 무대에 올라가고, 작품 전시나 가족모임, 세미나, 농촌·예술 체험 등을 연중 운영한다.

운동장에서 족구를 할 수도 있고 가장자리엔 농산물을 심어 농촌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주방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차로 5분 거리 안에 있는 농협마트를 이용해 장보기가 가능해 짐을 싸들고 오지 않아도 간편하게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다.

시골마다 하나쯤 있는 폐교는 흉물로 변하기도 하는데 살구나무예술촌이 들어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주민들의 호응도가 높다. 이곳에선 마을 주민들에게 모든 공연을 무료로 보여주고 있으며 늘 개방해 놓고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취재를 위해 방문한 날엔 원주출신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신동필 씨의 사진전 '탄광촌 사람들'이 열리고 있었고, 오는 15일부터 18일까진 위트극 '변기'를 공연한다.

임춘희 기자hee@wonju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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