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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2부: (22)문막읍 포진리

자연마을을 찾아서-소금배 드나들던 나루터 "시끌벅적 했었지" 임춘희 기자l승인2010.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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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직후까지만 해도 마을 앞까지 닿아있던 강으로 짐을 실어 나르던 마을 문막읍 포진리(浦津里). 물가를 뜻하는 포(浦)와 나루 진(津)을 사용하는 마을 이름에서 '물'과의 연관성을 알 수 있다.

겉으로만 봐서는 물길이 있었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어 전혀 믿기지 않지만 대부분 농토로 변한 땅을 파헤치면 그 자리가 강변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모래흙이 나온다는 것이 한상윤(67) 이장의 설명.

문막읍 중간에 자리 잡고 있는 포진리는 섬강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포진리 동쪽에는 국수봉과 명봉산이 휘둘려 있어 흥업면과 경계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섬강을 경계로 반계리와 접해 있다. 남쪽으로는 후용리와 궁촌리, 북쪽은 문막리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문막 지역은 도내에서는 철원 다음으로 평야가 넓어 대부분 벼농사를 짓고 있는데, 포진리 주민들도 벼농사가 주 업이다. 벼농사 외에 옥수수, 감자, 들깨를 조금씩 심어 가족과 지인이 나눠먹거나 내다 팔기도 한다. 현재 84가구 210명 정도가 모여 살고 있으며 근래에는 박사를 많이 배출해 '박사마을'이라고도 한다.
 
전주이씨 집성촌

   
이희권, 이희진 옹 형제

포진리 역사는 전주이씨(全州李氏)와 평강최씨(平康崔氏)가 만들었다고 한다. 개나루라고 불렸던 나루터가 있던 마을에는 전주이씨가 자리를 잡고, 개나루 남쪽에 있는 시무리에는 평강최씨가 군락을 이뤘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무리 쪽은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어 10리까지도 다 보인다고 해 '시무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 평강최씨는 한 가구만 남아있고 모두 떠난 상태이다.

1570년대에 세종대왕 6대손인 양천공(陽川公)이 조정이 혼란스러울 때 벼슬 뜻을 버리고 세상을 피해 숨어 살 계획으로 어머니와 자식들, 조카들까지 데리고 강릉으로 가던 중 원주에서 우연히 할아버지의 문하인(門下人)을 만났다. 그가 영동지방에는 농사지을 땅과 살 집이 없다며 그곳으로 가지 말라고 말리는 바람에 이곳에 여장을 풀었고, 포진리는 전주이씨가 모여 사는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는 이호식(70) 전 이장은 "15여 년 전만 해도 전주이씨 50가구 정도가 살았었는데 지금은 많이들 떠나서 11가구가 남아있다"고 말했다.

전주이씨 후손 이희권(89) 옹과 이희진(83) 옹은 형제다. 두 어르신은 앞·뒷집에 살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 연로하지만 아직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아침저녁으로 논에 물꼬를 열고 닫는다. 한 마을에서 형제가 팔십 수를 넘기며 논일을 하고 있는 것은 요즘 세상에 흔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더 건강하게 오래오래 이 마을을 지켜 주었으면 하는 것이 마을사람들의 바람이다.

건장한 뱃사람

그 옛날에는 뱃길을 이용해 서울에서부터 이곳까지 물품을 운반했다. 그 당시 소금이 운반돼 오면 이곳 나루터에 내린 소금을 횡성이나 멀리 대관령을 넘어 강릉까지 어깨에 짊어져다가 파는 소금장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무거운 소금을 한 가마니씩 짊어지고 먼 길을 다녔던 그들은 워낙 힘이 세고 건장해 '뱃놈'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소금 한 가마니를 팔면 1년 치 양식을 벌었다고 할 만큼 소금이 귀한 세월이었다.

그래서 섬강 나루터는 늘 상인들로 북적거렸다.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나 상인들은 나루터 근처 주막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배가 운반수단이었던 그 세월엔 이곳이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현재 공단이 들어선 곳은 50년대 후반까지는 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곳에 땅콩을 캐러 가거나 밤을 따러 갈 때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수량이 많아 마을 가까이까지 강이 닿아 있었기 때문에 배는 이 마을 주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던 것.

개나루 서쪽 강변에 있는 마을을 동가장이라고 하는데 이 마을은 물이 돌아드는 가장자리라는 뜻이며 예전에는 주막거리가 이뤄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4가구가 살고 있다.
 
느티나무 세 그루…삼괴정

낡은터라고 하는 삼괴정은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세월을 증명하듯 구불구불 휜 허리로 서 있다. 지난 1982년 삼괴정 느티나무는 보호수로 지정됐다. 이곳은 지금 포진2리에 속해 있고 괴정마을이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정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없다.

세 그루의 느티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웠고 그늘엔 마을 주민들이 돌을 두들겨 만들어 놓은 장기판이 놓였다. 이곳을 지날 때면 장기판 앞에 자리 잡고 앉아 망중한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아쉬움이 있다면 나무가 많이 지쳐 보인다는 것. 벗겨진 외피를 보호하기 위해 덧 씌워 놓은 재질이나 나무가 기우는 방향에 받쳐놓은 받침대가 느티나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받침대의 차가운 느낌을 다른 재질로 바꾸었으면 하고, 마을 주민이나 지나는 객들이 잠시 쉴 수 있도록 주변 공간을 잘 정리 한다면 이름처럼 운치 있는 느티나무의 생명이 훨씬 오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포진1리 마을회관 근처에도 느티나무가 있다. 재밌는 것은 이 느티나무도 세 그루다. 하지만 애초에 세 그루를 심은 것이 아니라 한 그루 느티나무가 세 그루로 번식했다는 것이 마을주민의 설명. 세 그루가 한 군데 붙어서 있는 것을 보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더운 여름엔 이 느티나무 아래가 마을 주민들의 피난처다. 나무를 경계로 남녀가 따로 앉아 더위를 피하고 있다고 한다.
 
박사가 많이 배출된 마을

이호식 전 이장은 "우리 마을에서는 유난히 박사가 많이 배출 됐다"며 "이학영 한경대학원 원장과 이시영 삼척대 교수가 이 마을에서 배출한 박사며, 이민영 박사는 미국을 오가며 대기업 연구실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전 이장은 "그 외에도 삼촌과 조카가 함께 박사가 된 집도 있다"며 "다섯명 정도 더 있는 것으로 아는데 누군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노령화된 농촌…그래도 벼농사는 희망적

농촌의 안타까운 공통점은 젊은 사람은 떠나고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만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이 마을에도 60대가 훨씬 넘은 어르신들이 농사를 짓고 있다. 그래서 빈집도 군데군데 보인다. 자녀들은 대도시로 떠가고 노인들만 농사를 짓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면 그 집은 빈 집이 된다. 멋스러운 고택도 몇 채 보이지만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풀숲으로 우거졌고, 지붕이나 담 일부가 내려앉아 있다.

그래도 이 마을 주민들은 표정이 밝다. 이유는 단 하나 농민이기 때문이다. 땀 흘려 가꾼 벼가 해가 갈수록 미질이 좋아지고, 문막농협의 적극적인 홍보와 판로개척으로 재고가 없다는 것. 풍작을 이루고도 판로가 없어 재고 때문에 고민하는 지역과는 달리 토토미를 생산하는 이 지역에선 전량 판매된다니 반가운 소식이다.

한 이장은 "문막농협과 곽노창 조합장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전량을 판매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열정적으로 농민을 돕고 있는 그 분들이 정말 고맙다"고 전했다. 또 "올 해는 많은 비로 벼가 쓰러지긴 했지만 정성껏 추수해서 자연 바람에 잘 말리는데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임춘희 기자 hee@wonjutoday.co.kr


임춘희 기자  hee@wonju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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