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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2부: (9)매지농악의 흥업면 회촌마을

자연마을을 찾아서 고민교 시민기자l승인2009.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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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명나게 농악을 즐기고 있는 마을사람들. 회촌마을 농악은 2005년 강원도 무형문화제 18호로 지정됐다.  
 

마을입구로 들어서면 장승과 함께 농악단 모형이 먼저 반긴다. 꽹과리와 장구소리가 금방이라도 울려 퍼질 듯 생동감이 있다. 조금 더 지나면 박경리 선생이 생전에 생활했던 토지문화관이 나온다.

문화와 역사가 숨 쉬는 회촌마을

   
 
  ▲ 매지농악 기능보유자이자 보존회장인 강성태 씨.  
 

"토지문화관이 들어오면서 좋아진 것이 있다면 단연코 도로지. 그 전에는 포장도 안되어 있었고 길도 좁았어. 토지문화관 짓는다고 길도 넓히고 포장도 다 했잖아. 1999년쯤 토지문화관이 개관했지 아마…" 김귀녀(77) 할머니의 말이다. "15살에 시집왔는데, 그때는 정말 깡촌이었어. 워낙 가난하기도 했지만, 우리 영감 죽은 지 벌써 이십년이 넘었으니 고생이 많았지. 일곱이나 되는 자식을 혼자 다 키웠잖아. 마을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걱정하고 도와주지 않았으면 살기 어려웠어. 특히나 이 마을은 인심 좋고 잘 뭉치기로 유명해. 마을행사 때마다 모두가 함께 손을 보태지." 하며 담배에 불을 붙이신다.

 백운산 골짜기에 들어앉은 회촌마을은 옛날부터 전나무가 많아 전어치마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250년을 전후해 경기김씨가 터를 닦았던 곳이라고 한다. 이후 곡부공씨, 백천조씨, 인동장씨 등이 들어와 살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인동장씨는 대부분 회촌을 떠났다고 한다. 지금은 여러 성씨가 서로 공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옛날에 이렇게 길이 나지 않았을 때는 원주까지 다 걸어 다녔지. 방등고개라고 높은 고개는 아니지만 이 고개를 넘어야 원주까지 갈 수 있었어. 고개 넘어 1.4후퇴 때 피난 갔다 돌아와 보니까 몇 집만 남고 다 타버렸더라고. 움막 짓고 살다가 새집 짓고, 지붕개량하고, 다시 짓고. 그렇게 산거야. 1970년대 새마을운동하면서 한 사람 겨우 다니던 길이 신작로가 되었어. 그 후로 버스가 들어왔지." 58년째 마을에 살고 있는 김영희(78) 할머니가 증언하는 회촌마을의 변천사다.

반듯한 도로가 생기면서 세상과 쉽게 소통 할 수 있게 되었고 교통이 편해지면서 화전을 일구려는 사람들이 들어와 한 때는 70~80가구가 살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의 화전정리 사업으로 회촌 주변사람들 중 절반 정도가 마을을 떠났다. 현재는 39가구가 살고 있다.

회촌마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대동계가 잘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을의 중요한 행사나 사업방향을 논의하고 의결하는 자치조직이 대동계다. "마을에 안건이 있으면 임원회를 먼저 소집합니다. 거기서 나온 의견으로 전체회의를 하기도 하고 임원들이 결정하기도 하죠."

   
 
  ▲ 농악단 모형이 설치된 마을입구.  
 

 마을의 최고 의결기구 대동계

고봉열(63) 대동계회장의 말이다. 올해로 8년째 맡아오고 있는데, 모든 일을 대동계의 의결에 따라 처리하기 때문에 주민들의 불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마을주민 100%가 대동계 회원이다. "외지에서 들어온 가구가 11~12가구 정도 될 거예요. 오래된 분은 한 10여년 되셨고, 작년과 올해 이사 온 분들도 있어요. 모두 대동계회원이 되도록 유도합니다. 싫다고 하시는 분들이 별로 없더라구요. 마을행사가 1년에 5~6회 정도 되는데, 다들 참석해서 도와주시지요." 옛날 농촌마을의 공동체 문화가 아직도 살아있는 마을이라는 느낌이 든다.

"기록은 없지만 대동계가 내려온 지 한 200년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옛날어르신들은 회비를 조금씩 걷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회비를 걷지 않아도 운영이 됩니다. 농악으로 전국대회 나가서 마련된 기금이 있고, 마을사업으로 남은 이익금을 모아두었거든요. 많지는 않지만 공공기금을 낼 만큼은 되지요." 마을사람들간 화합과 단결력이 만들어낸 결실이다.

"하지만 갈수록 힘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온 주민들은 늙어 가는데,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지 않으니 늘 일손이 모자라지요. 달맞이축제도 우리 주민들의 힘만으론 역부족입니다. 단오성황제도 마찬가지구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서 기획을 한다거나 무엇을 어떻게 꾸며볼까 하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냥 대대로 해온 것을 진행해 나가는 것밖에는 없어요. 마을주민들이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다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면 그만둘 수밖에 없겠지요." 라고 말하는 고봉열 회장.

옛날에는 성황제 때가 되면 마을에서 키운 돼지를 직접 잡을 정도였다고 한다. 65세 미만인 주민수가 10여명 안팎이라고 하니, 품이 많이 드는 행사를 얼마나 오래 이어갈지 걱정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단오제를 통해 전통을 지켰던 저력이 숨어 있는 곳이다. 2005년 문화관광부가 추진한 '문화·역사마을 가꾸기 사업'에 선정되는 등 공동체문화계승을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젊은 사람들이 없다는 것은 이곳 생활로는 먹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이겠죠. 공기 좋고 물 맑은 시골에 사는 것은 좋지만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선뜻 들어올 수가 없는 겁니다." 회촌마을에서 태어나 아직까지 이곳을 떠나 산 적이 없는 공재은(39) 반장의 말이다. 공 반장도 직업이 따로 있다. "어떻게 하면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까가 최대 고민입니다. 새롭게 집을 짓고 마을에 들어온 사람들도 생활만 이 곳에서 할뿐 직업은 따로 있어요. 농사짓는 사람들은 모두 토박이들 뿐이지요. 뭔가 새로운 사업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참 어렵습니다."

농악은 농경사회에 뿌리를 묻고 있다. 농부들 사이에 행해졌던 농악은 지역별, 시대별로 독특하고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매지농악은 원주권과 영서이남의 전형적인 형태의 가락과 진풀이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05년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 40여가구가 살고 있는 회촌마을 전경. 대대로 이 마을에서 살아온 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시골마을에서 살고 싶어 들어온 사람들은 별도 직업을 가지고 있다.  
 

"우리 아버지가 농악을 했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따라다니며 흉내 내곤 했지요. 아버지 뒤를 이어 내가 농악을 했고, 둘째아들이 제 뒤를 잇고 있어요." 매지농악 보존회 회장이자 기능보유자인 강성태(68) 회장. 농악이 한사람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매지농악이 빛을 보기까지 강 회장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처음에는 동네사람들로 팀을 만들어 농악을 했지요. 올해로 17회째 달맞이축제를 했는데, 농악 때문에 시작했던 행사였어요. 농악은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를 갖춰야 재미난 법이거든요. 경제적으로도 힘든 적이 많았는데, 열심히 하다보니까 후원자들이 생기더라구요. 그럭저럭 유지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1980년대 초부터 강 회장은 마을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매지농악을 타 지역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한 것.

"아무리 생각해도 동네사람들로는 농악의 명맥을 유지하기가 어렵겠더라구요. 그래서 학교나 마을 등 여기저기 나가서 매지농악을 가르친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제는 제자들이 또 제자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매지농악 보존회를 통해 농악을 배운 사람들만도 몇 천 명이 넘는단다. "그저 농악이 좋아서 농악만 했어요. 기능보유자 심사를 할 때도 심사위원들한테 대들었으니까요. 기능보유자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되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도 없었어요. 알아서 하시라… 그런 셈이죠." 농사를 지으면서 3대가 농악 인생이다.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매지농악. 이제는 풍물패가 창단되면서 전승시스템이 갖추어졌다. 단순한 마을 농악이 아닌 예술성이 강조된 농악으로 명성을 이어가기까지 강 회장 일가가 그 중심에 있다.

마을을 지키는 성황당

   
 
  마을을 지키는 성황당  
 

회촌마을 사람들은 음력 5월 5일이 되면 성황당에서 단오제를 지낸다. 원래는 마을 냇가에 성황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날 주민들 꿈에 성황신이 나타났다고 한다. 큰 비로 물이 불어나게 되면 성황당 있는 자리가 위태로우니 옮겨 달라고 했다는 것. 그래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앉았다고 한다.

성황당은 산길을 걸어서 10분 정도 올라가면 나온다. 7개의 줄기가 자라고 있는 회나무(칠성목)와 3개의 줄기가 자라는 엄나무(삼성목)가 성황당을 호위하고 있다.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더니 잠겨있다. "영험하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무당들이 와서 성황당 안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어지럽혀놔서 문을 잠궈놓고 있어요. 안을 보고 싶은 분들은 얘기하면 바로 열어 드립니다." 강성태(68) 회장의 말이다. 허름했던 성황당을 헐고 새로 지었다고 한다.  고민교 시민기자

 


고민교 시민기자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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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나게 농악을 즐기고 있는 마을사람들. 회촌마을 농악은 2005년 강원도 무형문화제 18호로 지정됐다.

매지농악 기능보유자이자 보존회장인 강성태 씨.

농악단 모형이 설치된 마을입구.

40여가구가 살고 있는 회촌마을 전경. 대대로 이 마을에서 살아온 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시골마을에서 살고 싶어 들어온 사람들은 별도 직업을 가지고 있다.


김영희 씨(78)

김귀녀 씨(77)

공재은 반장(39)

고봉열 대동계 회장(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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