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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2부: (7)문막읍 건등리(1부)

자연마을을 찾아서-상고시대부터 존재…개발과 보존 한눈에 고민교 시민기자l승인2009.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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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 문막 물고비나루터에서 나룻배에 자전거를 싣고 있다. 사진 중앙 뒷편 멀리 건등산이 보인다.(사진은 문막읍사에서 발췌한 것임.)  
 

문막은 왕건과 견훤이 쟁패를 다툰 역사의 현장이고, 효의 대표적 인물인 충효공 황무진이 일생을 보낸 고장이다. 지형적으로는 섬강이 있어 과거로부터 영서에서 동해안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최대의 곡창지대다.

철도의 개통으로 침체기에 빠졌던 문막이 수도권과 인접한 지리적 요건과 맞물려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번 자연마을탐구는 문막의 과거와 현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건등리를 집중 조명해보고자 한다. 제1부는 건등리의 역사를 중심으로, 제2부는 조상들의 혼을 이어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등안마을과 메나골을 찾아가 본다.

고인돌 2기 발견 청동기 유물 출토

건등리는 42번 국도 북쪽에 위치해 있고, 건등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등2리 구라우마을에서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인돌 2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상고시대 때부터 이미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궁촌리 서들에서도 간돌검, 간화살촉, 반달칼 등과 무문토기 등 청동기시대의 산물이 출토되었다. 바로 옆에 섬강이 흐르고 있어 정착해 살기엔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래서 섬강의 중적층에 유물이 많이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 초기 철기시대의 타날문토기 등 다양한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조선 중기에는 건등산을 중심으로 세 개의 성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게 된다. 건등산 서북쪽에는 경주김씨들이 등안마을에 터를 잡았고, 남쪽에는 전주이씨 영해군파가 너그네 일대에서, 동남쪽에는 원주이씨가 메나골에서 터를 잡고 살면서 지금까지 대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말기에서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까지는 섬강을 이용한 영서지역 수운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1940년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수운은 철도의 힘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물류의 집산과 이동, 상업활동의 중심이 원주로 옮겨가게 되면서 전형적인 농촌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운명을 겪었다.

1980년대에는 인구가 줄다가 1980년대 말 농촌 일자리 정책을 펴면서 인구가 늘기 시작했다. 1990년 이후 10년 사이에 인구가 배로 늘었다.

건등리는 옛 고을의 정취가 그대로 살아있는 마을과 고층아파트가 즐비하게 늘어선 마을로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건등1리 등안마을, 건등2리 너그네·구라우마을, 건등3리 메나골·동경마을은 여전히 농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건등4리부터 8리까지는 고층아파트와 상가가 밀집된 지역이다. 1980년대 말부터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구릉지대와 들판이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 한 것.

대규모 아파트가 형성될 수 있었던 데는 반계리 농공단지의 영향이 제일 컸다고 하겠다. 산과 논밭에 불과 두서너의 농가가 있었던 동화리가 사원아파트 택지로 조성되면서, 일반 아파트도 대규모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동화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건등리가 덩달아 아파트 밀집지역이 되면서 인구 역시 급격히 늘었다.

문막의 등뼈인 원주, 여주 간 42번 국도를 4차선으로 확·포장하면서 길 주변에 많은 상가와 주택이 들어섰다. 42번 국도는 1910년도에 만들어졌고, 2000년도에 4차선으로 확장하며 산업도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동화리 농공단지가 조성되었고, 건등산 주변 일대가 택지로 조성되고 있어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왕건이 견훤과 싸워 승리한 산

건등산의 유래: 문막은 비교적 낮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28개가 넘는 산들 중 건등산이 가장 명산으로 문막을 대표한다. 고려 태조가 된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각축전을 벌여 승리를 거둔 산이기도 하다. '왕건이 올라' 진을 치고 군사를 지휘했다 해서 건등산이 되었다. 그전에는 기린산으로 불렸으며 고깔모양을 하고 있다. 해발 260m 정도로 높지 않지만 주변이 잘 관측되는 감제고지다. 후삼국시절 견훤은 후용리와 궁촌리 경계의 산에 토성을 쌓고 궁실을 짓는 등 기반을 쌓았는데 왕건에게 패함으로써 세력화 작업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견훤의 패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견훤과 왕건이 오랫동안 결전하지 못하고 활싸움만 하는 대치상황이었다. 밀정을 통해 견훤의 진지에서 식량이 떨어지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 한 왕건. 수숫대와 삼대를 모아 허수아비를 만들어 군사가 늘어난 것처럼 꾸며놓고는 독한 석회를 강물에 뿌려 흘려보냈다. 굶주림에 허덕이던 견훤의 병사들이 쌀뜨물인 줄 알고 이 물을 마시고 하나둘 죽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병사들도 사기가 떨어져 더 이상 싸우려 하지 않자 결국 진지를 내주고 후퇴했다고 한다.

건등산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초기에 가장 큰 소유권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당시 최고의 세도를 누렸던 민씨 문중에서 건등산에 몰래 가묘를 써놓고 자기네 산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전주이씨 영해군파 문중의 이현기씨가 조상대대로 살아온 증거를 제시하며 소송을 했고, 민씨 문중에 일침을 가하면서 승리했다. 문막의 상징인 건등산을 세도에 밀려 잃을 뻔한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민씨 문중 사건은 아버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요. 건등산 전부는 아니고 일부가 전주이씨 영해군파 문중소유예요. 오백년 세월 대대로 그 음덕을 입고 살지요." 이석구(71) 원주신협 이사장이 밝혔다.

최근 건등산 개발 붐이 일면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건등산은 고려건국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건이 견훤에게 승리함으로써 주도권을 쥐게 되었으니까요. 잊혀진 사실을 복원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준희(45)시의원은 건등리의 모체라고 할 수 있는 건등산 관련 조례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살다가 건강상 이유로 6년 전에 가족을 데리고 귀향했다고 한다. "젊은 제가 시의원이 된 것은 지역토박이라는 프리미엄이 많이 작용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지역의 정체성을 회복해달라는 시대적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건등산의 훼손을 막으면서 보존과 활용측면에서 생태 공원화하 는 방법도 모색 중에 있다고 한다.

신·구학문 동시에 가르친 '건등학원' - 1939년 유지 몇사람이 설립

1939년에 설립된 건등학원은 김벽석(김영열)씨가 아버지에게 학원 지을 땅을 허락받아 김동기, 김동길 씨 등 건등리 유지 몇 분들이 모여 설립하였다. 새 교사를 지을 준비를 하는 한편 학생들을 모아 석지에서 개교를 하였으며 초대 교사로 김동길씨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1년 후 원평에 동네 분들이 모두 힘을 합쳐 교사를

   
 
  ▲ 안창대교 쪽에서 본 건등산.  
 
   
 
  ▲ 건등리 입구에서 본 건등산.  
 

새로 짓고 이전을 하였으며 '개량서당'이라고 불렀다. 신학문과 옛 학문을 함께 가르쳤으며 김충렬 박사도 이 학원을 다녔다고 한다. 처음에는 한 분의 교사가 가르치다가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가르치게 되면서 2명의 교사가 가르치게 되었다. 교사로 계셨던 분들은 김동길, 김동설, 김흥열, 정준철, 이성룡, 김주열, 황의신씨 등이다. 건등학원은 해방 전까지 잘 운영되다가 해방이 되면서 폐교되었다.(문막읍사, 830쪽 발췌)

원주 최초의 학교는 1896년에 설립된 원주초등학교 로 원주 공립소학교로 출발했다. 건등학원은 작은 사설학원에 불과했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이곳에서 배워서 문막보통학교에 편입했다고 한다. 건등리에서 유독 교육자와 공무원이 많이 배출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등안마을에 사는 이준희(45)시의원의 말에 의하면 건등리는 오래전부터 교육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은 곳임을 알 수 있다. "등안마을에서 태어나 살면서 왕건의 역사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어요. 유치원도 왕건유치원을 다녔죠. 나이가 차면 누구나 초등학교를 들어가듯이 왕건유치원을 다녀야 하는 줄 알았어요. 아마도 문막 최초의 유치원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거의 무료였던 기억이 납니다." 유치원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중반 왕건유치원 설립

사한 김창일의 14대손 김기정(74)씨. 그가 왕건유치원을 설립, 운영했던 원장이다. "횡성중고등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다가 등안마을로 들어왔어요. 결혼도 하지 않은 혈기왕성한 25살 청년이었죠. 워낙 농촌이 낙후되어 있어서 지도자적인 신념을 갖고 들어온 거예요. 마을발전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각오가 대단했었으니까요."

1960년 중반에 설립한 왕건유치원은 1980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때까지 문막 최고의 유치원이었다고 한다. "교육은 못자리판에서 판가름 납니다. 모내기 할 때 모판의 모들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아이들의 교육은 어려서해야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왕건유치원에 최선을 다했던 거예요."

왕건유치원은 무료로 운영되었다. 본인 소유의 땅에 직접 가르쳤기 때문에 큰돈이 들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시골살림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라는데. "나중에는 원주시에서 알고 유치원에 지원을 해주더라구요. 초등학교에서는 낡은 책상과 칠판을 주기도 했고, 땔감이나 쌀도 지원해 주었어요. 우리 유치원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면 모든 면에서 월등한 실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입소문이 많이 퍼졌죠. 아내가 보모 노릇을 도맡아 했는데 나중엔 3명으로 늘었어요. 문막에 있는 학생들이 우리 마을로 공부하러 왔을 정도로 유명했었죠."

왕건유치원에서 공부했던 학생들이 지금은 모두들 사회적인 일꾼이 되어 곳곳에서 제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고 한다. 문막에 많은 자연부락이 있지만 건등리 출신만큼 사회적 인사를 많이 배출한 곳도 드물다고. 그만큼 자긍심도 대단하다.

   
 
  ▲ 건등리 마을회관은 왕건유치원이 있었던 곳이다.  
 

"15년 동안 유치원을 운영했어요. 그동안 결혼도 하고 아이들이 생기니까 돈이 필요하더라구요. 양잠을 시작했죠. 그러다보니 유치원에 치중할 수 없었어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양도했는데, 내가 했을 때만큼 운영이 되지 않았어요. 나중에 우리 마을에서 이사 나가고 말았죠. 지금의 마을회관 자리가 왕건유치원이 있었던 곳입니다.

" 양잠을 하면서 돈은 벌었지만 왕건유치원을 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보람 있었다는 김기정씨. 지금은 [보인원]이라는 이름으로 3,500여 평에 정원수를 가꾸고 있다.

 

 


고민교 시민기자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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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문막 물고비나루터에서 나룻배에 자전거를 싣고 있다. 사진 중앙 뒷편 멀리 건등산이 보인다.(사진은 문막읍사에서 발췌한 것임.)

건등산은 왕건이 올라 승리를 거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건등리 입구에서 본 건등산.

안창대교 쪽에서 본 건등산.

건등리 마을회관은 왕건유치원이 있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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