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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2부: (13)봉산동 2통(살대울·모래기·못골마을)

자연마을을 찾아서 고민교 객원기자l승인201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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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여가구가 살고 있는 모래기 마을 전경.  
 

"발전은 원하지만 자연은 보존됐으면…"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깨어난다는 경칩이 엊그제였다. 옴쑥옴쑥한 새싹들이 머리를 내미는 봉산동 살대울마을로 들어선다. 며칠 전 내렸던 비로 논에는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다.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봄기운을 물씬 풍긴다.

봉산동(鳳山洞)은 산의 모양이 봉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예로부터 정기가 세서 인물이 많이 난다고 알려져 있다. 봉산의 끝봉을 '봉산미'라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봉산미 부근에 쇠를 박아 혈(穴)을 자름으로써 봉산의 정기를 죽였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봉살미' '봉살뫼'로 불리기도 했다.

살대울마을은 모래기마을과 못골마을 등 3개 마을을 합해 봉산동 2통에 속한다. 중앙선철도 아래쪽에 살대울마을이 있고, 철도 위쪽으로 못골과 모래기마을이 있다. 이중 살대울마을이 40여 가구로 가장 많이 살고 있고 모래기마을은 20여 가구, 못골은 12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동지역에 속해 있으면서도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아직까지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는다. 번재 쪽으로 교도소가 이전한다고는 하지만 이 곳까지 발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 주민들의 얘기다. 시골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지만 젊은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노인들만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봉산동이 1, 2, 3통으로 나눠져 있는데, 면적으로 보면 2통이 가장 넓어요. 하지만 가장 낙후돼 있지요. 아파트가 들어와 자연경관이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지만 자연을 잘 보존하면서 살기좋은 마을로 발전됐으면 좋겠어요." 6년째 통장을 맡고 있는 이광희(66) 봉산동 2통장의 말이다.

 

   
 
  ▲ 300년 넘게 살대울마을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태종 이방원에서 유래된 살대울
 
살대울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태종 이방원의 이야기와 맞물린다. 원천석을 찾아 원주에 내려온 태종이 화시래에서 활을 쏘았는데, 화살에 맞은 새가 떨어진 곳이라고 해서 살대울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살대'는 화살대를 의미하고, '울'은 여울물을 의미한다.

살대울마을에 2통 경로당이 있다. 못골과 모래기마을 노인 몇몇은 매일 이곳에 내려와 점심을 해먹으면서 하루를 보내곤 한다. "3개 마을이지만 화합이 참 잘 됩니다. 매월 13일이 월례회 날인데 많이들 참석하지요. 농한기 때는 매일 모여 농사지은 쌀로 점심을 해 먹고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소일합니다. 보건소에서 나와 진료도 해 줘요. 앞으로는 두 달에 한번 정도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진료를 해주기로 담당 간호사와 얘기를 했지요. 진작부터 정기적인 진료를 받았어야 했는데, 그동안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았어요." 김영환(75) 노인회장의 말이다.

살대울마을은 경주김씨 상촌공파가 한때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세 집 정도만 남아 마을을 지키고 있지만, 20여 년 전 작고한 김공열 씨 때까지만 해도 마을 일 대부분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원주시 초대 조합장을 지냈다는 김공열 씨는 마을발전을 위해서 다리도 만들고 보호수관리도 직접 하면서 마을발전에 앞장섰다고. 경로당 옆에 있는 느티나무 두 그루는 300년이 넘은 고목으로 1982년 강원 원주-16호 보호수로 지정됐는데 아직도 팻말에는 관리자가 김공열 씨로 되어있다.

"원주읍일때는 살대울마을에 봉산3구사무소가 있었어요. 원주시로 승격되면서 사무소가 없어졌지요. 그때는 봉산 1구, 2구, 3구로 나눠져 있었고 동사무소가 마을에 있다 보니까 행정일 보기가 편했었는데…" 김공열 씨와 한집안인 김구열(79) 옹의 말이다. 4대째 이 마을에 살고 있다고 한다. "6.25때 피난 갔다 오니까 여러 집이 불에 탔더라고요. 그런데 나라에서 12평정도 지을 만큼 목재를 무료로 나눠주었어요. 거기에다 벽돌과 자재를 좀 더 보태서 집을 지었죠. 이 마을이 워낙 외진 곳이라 발전이 더딘데, 그나마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도로가 좋아지고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바꿔 얹었지요."

이 마을은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집집마다 지하수를 파서 물을 마신다. 하지만 아직까지 물이 모자라지는 않는다고. "내가 소초에서 스무 살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55년 살았거든. 그런데 마을이 참나무로 빼곡하더라고. 하도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서 동네가 다 깜깜한 거라. 마을 앞도 산으로 가려져 있었고. 그런데 한 20년 전에 그 많던 참나무를 싹 베어버리더니 하나 둘 돼지우리가 생기지 뭐야. 돼지를 잘 키우나보다 했더니 글쎄 돼지 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손 털고 도시로 나가버렸어. 그래서 이곳저곳 흉물스럽게 돼지우리가 그냥 남아있지 뭐예요." 서옥삼(75) 할머니의 회고다.

요즘 보기 드물게 3대가 한집에 살고 있다고 한다. 50대 큰아들 내외와 손자들, 아직 장가를 가지 못한 40대 둘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남들은 며느리랑 살면 불편하다고들 하는데 나는 외지에 나가 사는 딸들보다 며느리가 더 편하고 좋아요. 모르는 것도 많이 알게 되고. 우리 며느리 같은 며느리가 세상에 어디 있을라고."

산모퉁이마을 모래기
 
살대울마을 위쪽에 나있는 외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철도가 나오고 바로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못골이고 왼쪽으로 가면 모래기마을이다. 모래기마을은 산모퉁이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차 한 대 겨우 다닐 수 있는 소로를 따라 봄마실 가듯 천천히 가다보면, 언덕에 있는 무덤을 중심으로 집들이 빙 둘러서 있다.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풍경이다. "우리 마을은 무덤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마을이 생겼다고 해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무덤 옆에서 뛰어놀면서 컸어요. 무덤이 있어서 무섭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요. 마을사람들은 밤에도 무덤주위에서 오순도순 얘기꽃을 피웠죠. 무덤은 우리 삶의 일부일 뿐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대상이 아니예요." 고인석(69) 씨의 말이다. 아마도 무덤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먼저 집을 짓고 자리를 잡았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모래기마을은 대부분 나주정씨 문중소유라고 한다. 무덤주인은 정약용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정약용이 1836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무덤은 3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무덤주인은 오늘날의 군수쯤 되는 '가산대부'였다고 합니다. 정글 같은 산속에 이 묘가 들어섰고 그 다음에 집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명당자리 중의 명당자리라고 하는 '사두혈(뱀의 머리)' 자리라고 합니다. 뱀은 개구리를 먹고 사는데, 지관이 와서 보니 앞산이 개구리 형상이고 산 너머 마을이름이 못골(연못이 있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 거예요. 무릎을 치며 이곳에 묘를 썼다는 겁니다." 문중 묘를 관리하고 있는 최원규(60) 반장의 얘기다.

"토지개혁 당시 집을 짓고 살던 사람들이 땅을 소유한 것 말고는 개인소유 땅이 거의 없죠." 그래서 마을로 이사 들어오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마을 중심에 묘가 있기도 하지만, 문중에서 땅을 팔지 않는 한 땅을 소유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마을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으니 발전도 없다. 그래서 겉모습만 바뀐 100년 된 집들이 많다.

마을 앞쪽으로 폭 7m정도 되는 도로를 건설 중이다. 개구리형상을 한 앞산 한쪽도 외곽순환도로 건설로 깎였다.

연못이 있었다고 못골
 
마을 앞쪽은 철도가 지나가고 뒤쪽으로는 외곽순환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큰 연못이 있었던 곳은 외곽순환도로에 대부분 묻혀버렸고, 나머지는 논이 됐다. "내가 이곳에 이사 온지가 벌써 60년 넘었어요. 작은아버지가 여기서 살고 계셔서 우리도 이사 왔는데 참 첩첩산중이었지. 이사 오기 전에 이미 연못은 없었어요. 마을어르신들 얘기를 들으니까 아이들이 많이 빠져 죽는다고 주민들이 합심해서 메워버렸다는 거야." 성창환(70) 할아버지의 말이다. 이곳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원주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녔다고.

못골은 아직도 시내버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유암까지 걸어 나가서 버스를 타야한다. 모래기 마을도 사정은 마찬가지. 능골에서 타고, 살대울마을 사람들은 번재로 나가서 타야 한다. 6.25때 피난도 안 나갔을 만큼 외진 산골이라 조용하고 한가하다. 막다른 마을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천혜의 요새 같다.

   
 
  ▲ 모래기마을은 묘가 먼저 생기고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묘가 많다.  
 

 

"내가 기억하기로 1949년에 신작로가 생겼어요. 그전에는 한 사람 겨우 다닐 수 있는 소로였지. 전기도 1963년에 들어왔으니까. 전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전기 끌어오기 참 힘들었어요. 행구동 거름터에서 끌어왔는데, 도무지 전기공사할 생각을 안하는거야.

내일 공사하기로 하면 다시 미루고, 그래서 술 사 먹이고 다시 날짜 잡아놓으면 어기고…몇 번을 그렇게 했는지 몰라요. 한전에 직접 가서 얘기를 해도 자꾸만 뒤로 미뤄지고. 겨우겨우 전기를 끌어왔는데 세상이 정말 환하더구만. 그런데 그때는 콘센트를 많이 달지 않았어요. 콘센트를 많이 달수록 전기요금이 많이 나오니까 한 두 개씩만 달고는 했지. 농사도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로 지었는데 전기요금 낼 돈도 없잖아요. 지금이야 뭐 그렇게 어려운 사람이야 없지." 성창환 할아버지의 말이다.

 

   
 
  ▲ 못골 전경. 6.25때 피난을 가지 않았을 정도로 외진 마을이다.  
 

외곽순환도로 공사한 지도 벌써 3년째라고 한다. 도로가 완공되면 마을로 들어오는 넓고 큰 길이 생긴다고. 마을주민들이 대부분 노인들이라 차를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자손들이 집을 찾아오기가 한결 수월해지겠다. 주변 어디를 봐도 농사지을 물을 댈만한 곳이 없어 보이는데, 모자라지는 않는다고 한다. 집집마다 지하수를 파서 먹기도 하고 농사도 짓는다.

 

 

고민교 객원기자


고민교 객원기자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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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가구가 살고 있는 모래기 마을 전경.

300년 넘게 살대울마을을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모래기마을은 묘가 먼저 생기고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묘가 많다.

못골 전경. 6.25때 피난을 가지 않았을 정도로 외진 마을이다.

고인석(69)

김수열(79)

김영환(75) 노인회장

서옥삼(75)

성창환(70)

이광희(66) 통장

최원규(60) 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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