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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11)문막읍 반계리 창원황씨 집성촌

1부: 사라져 가는 집성촌-하늘이 낸 효자마을…헌다례 200명 운집 이상용 기자l승인2009.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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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계3리는 야트막한 동산을 등지고 자리한 양지바른 마을로 26가구가 살고 있으며 이중 20가구가 창원황씨이다.  
 

문막읍 반계3리는 야트막한 동산을 등지고 자리한 양지바른 마을로 26가구가 살고 있다. 시내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마을까지 약 700m 떨어져 있으며, 마을길은 차량 교행이 어려울 정도의 좁은 시멘트길로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아늑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어슴프레한 저녁나절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를라 치면 한 폭의 풍경화가 떠오를 만큼 수채화 같은 마을이다.

이러한 고립된 지형적 영향 덕분에 6.25 전란을 무사히 피해갈 수 있었다. 주민 황우건(70) 옹에 의하면 인근 마을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으나 반계3리는 파손된 집이 단 한 채도 없었다. 그래서 6.25 전란 직후에도 쌀밥을 먹는 반계3리 주민들을 인근 마을들에서 부러워했다고 한다. 반계2리와의 경계 쯤에 원주-여주간 산업도로가 나면서 주민들은 앞이 막힌 느낌을 받아 아쉽다고 전한다.

반계3리는 1반 골무내기와 2반 밤상골로 나뉘는데 골무내기는 물이 나오는 골짜기라서 골무내기라고 불렸다고 전한다(골+물+나기>골물나기>골무내기). 밤상골은 밤나무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로 벼농사와 고추농사를 짓는다.

   
 
  ▲ 충효공 황무진 위패를 봉안한 충효사. 마을 입구에 있다.  
 

26가구 중 20가구가 충효공파

이곳은 창원황씨 충효공파 집성촌이다. 전체 26가구 중 20가구가 창원황씨이다. 과거 마을이 흥했을 때는 창원황씨가 40가구 가량 됐다고 한다. 황우용(69) 옹은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황씨가 터를 잡기 전에는 서씨 집성촌이었는데 황씨가 번성하면서 황씨 집성촌으로 변했다"고 전했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반계저수지를 축조할 당시 상당수의 서씨 묘지를 이장했다고 황우용 옹은 말했다.

충효공파 시조는 하늘이 낸 효자(出天之孝子)라는 칭송을 받은 황무진의 조부 황치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효공파 종친회 황길환(60) 회장이 황치양의 15대 손이다. 황길환 회장은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며 경희대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또한 재경원주시민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황치양이 어떤 연유로 이곳에 터를 잡았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황무진의 출생년도(1568년)로 추측해보면 황치양은 1500년을 전후해 반계3리에 둥지를 튼 것으로 보인다.

15대 째 집성촌이 유지되면서도 다른 성씨를 배척하지는 않았다고 황재철(83) 옹은 말했다. 다른 성씨가 몇 가구 안됐기 때문에 오히려 집안처럼 받아들였다. 황문익(77) 옹은 "예전에는 정월 내내 이집, 저집 돌아가면서 떡국을 끓여 동네사람들을 불러 동네잔치를 벌였는데 타 성씨들도 모두 참석했다"면서 "그때는 매일매일이 잔치였다"고 회상했다. 여름에는 밀농사를 지어 수확한 밀로 국수를 밀어 매일 동네잔치를 벌였다. 하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풍경이다.

또 10여년 전까지는 마을 부녀회에서 라면, 소주 등을 떼다 마을회관에서 팔았다. 마을에 상점이나 식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교통수단이 발달하며 사라진 그리운 풍경이다. 지금도 상점이나 식당이 없긴 마찬가지다. 또한 고령화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마을에서 가장 젊은 사람이 황인필 씨로 올해 53세다.

그래도 친인척 20가구가 한동네에 살다보니 지금도 설날이면 집집마다 세배를 다니는 풍습이 남아있다.
 
충효공 위패 봉안한 충효사

주민들의 가장 큰 자랑은 마을 입구에 있는 충효사이다. 충효공 황무진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충효사는 일제 말엽까지 명륜동 향교자리에 있었으나 퇴락하여 후손들이 1965년 반계3리로 옮겼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으로 구성돼 있다.

시제는 음력 10월 10일에 지낸다. 주말이나 휴일에 시제가 열리게 되면 제법 모이지만 평일인 경우에는 30여명이 모여 시제를 지낸다. 충효사가 가장 북적일 때는 황무진 생신일인 음력 3월 23일인 헌다례를 올릴 때이다. 원주문화원 주관으로 2006년부터 헌다례를 지내고 있다.

이때는 원주문화원 회원과 학생 등 200여명이 참석한다. 황무진의 충효사상을 기리기 위해서다. 또한 평소에도 학생들이나 가족단위로 충효사를 다녀가는 일이 간혹 있다고 한다. 충효사 관리는 종친회 총무인 황인필 씨가 맡고 있으며, 7월이면 종친회원들이 모여 벌초를 한다.

한편 충효사를 강원도 지정문화재로 지정해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작년 6월 원주문화원 주최로 열린 '2008년 황충효공헌다례 평가회'에서도 강원도 지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편 주변정비와 효행상 제정 등을 통해 퇴색돼 가는 충효의 의미를 일깨워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이상용 기자 sylee@wonjutoday.co.kr

 

   
 
  ▲ 사진 왼쪽부터 황인필(53), 황재철(83), 황우용(69), 황문익(77) 씨.  
 

 


'하늘이 낸 효자' 충효공 황무진

충효공 황무진(黃戊辰 1568∼1652)의 본관은 창원, 자는 자룡, 호는 벽룡담이다. 봉산동 무진고개 너머에서 태어났으며, 집안이 가난해 반계3리로 옮겨 살았다. 무진년에 낳았다 하여 무진이라 했다. 성품이 어질고 기골이 장대하며 정성을 다해 부모를 섬겼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하늘이 낸 효자'라는 칭송을 받았는데 호랑이도 그 효성에 감동해 출입할 때 호랑이를 타고 다녔다는 전설이 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사한 김창일, 관설 허후 등과 함께 의병활동을 해 그 공으로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과에 봉해졌다. 효정 3년 85세로 죽은 뒤 나라에서는 그의 시호를 충효공이라고 하고 그 이듬해에는 효자정문을 세우게 했다.
 
황무진에 관한 전설

황무진은 반계3리부터 강원감영까지 50리 길을 걸어 다녔다. 점심과 저녁 밥은 대개 감영에서 먹었는데 워낙 가난한지라 집에 혼자 계신 어머니 끼니 걱정에 자기가 먹을 저녁밥을 먹지 않고 가슴에 품고 달려가 어머니에게 대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밥을 품에 안고 감영을 벗어나는데 호랑이 한마리가 가로막더니 슬며시 자기의 등을 대는 것이었다. 황무진이 등에 오르자 호랑이는 반계3리로 달렸으며, 그 후론 아침저녁으로 호랑이 등에 업혀 왕복 일백리 길을 출퇴근 했다.

좀 늦게 퇴근하게 돼 어두운 밤길을 달리면 호랑이 눈빛과 그의 눈빛이 네 개의 등불같이 밝아 사람들은 사등선생 행차라고 일컬었다.

그러던 중 며칠동안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하루는 꿈에 호랑이가 함정에 빠져 슬피 울고 있었다. 잠에서 깬 그는 꿈에 본 곳을 찾아갔는데 충주 어느 깊은 산골짜기였다. 그런데 호랑이가 덫에 걸려 있었다. 황무진은 사냥꾼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호랑이를 덫에서 구해 주었다. 이것을 본 사냥꾼들은 호랑이를 다루는 용의 아들이라 하여 황무진을 자룡이라 일컬었다.

그는 두명의 아내와 헤어졌는데 이유인즉 아내가 어머니를 잘 모시지 않는다해서 였다. 세번째 아내 윤씨는 슬기로운 여인으로,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오랜 병으로 고생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는 어머니를 병에서 구하기 위해 용하다는 의원은 모두 찾아다녔는데 엄동설한에 어느 의원이 말하기를 잉어를 구해서 먹으면 효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살을 에일듯한 찬바람 속에서 두꺼운 얼음장을 깨자 그 속에서 비늘도 찬란한 잉어 한 마리가 얼음 밖으로 튀어나와 버둥대고 있지 않은가. 그는 천지신명께 감사하고 그것을 집에 가져가 어머니 약으로 해드렸다.

   
 
  ▲ 충효사 내 충효공 위패. 위패 뒤 병풍은 동양철학의 대가 고(故) 김충렬 박사가 썼다.  
 

 



이상용 기자  sylee@wonju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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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계3리는 야트막한 동산을 등지고 자리한 양지바른 마을로 26가구가 살고 있으며 이중 20가구가 창원황씨이다.

충효공 황무진 위패를 봉안한 충효사. 마을 입구에 있다.

충효사 내 충효공 위패. 위패 뒤 병풍은 동양철학의 대가 고(故) 김충렬 박사가 썼다.

사진 왼쪽부터 황인필(53), 황재철(83), 황우용(69), 황문익(77)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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