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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7)부론면 청주 한씨 집성촌

사라져가는 집성촌-부론면 노림리 고민교 객원기자l승인200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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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림리 사람들. 왼쪽에서 두번째 한윤우 종친회장, 다섯번째 한만국 종친회 총무.  
 

인열왕후 태어난 '왕비 마을' · · · 6.25전에는 150여가구 살아

왕비의 고장. 효종의 어머니 인열왕후 한씨가 태어난 부론면 노림리 일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왕비와 후궁을 4명이나 배출한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노림리는 3정승 6판서가 난 곳이어서 자타가 공인하는 명당마을이다. 풍수지리 전문가에 따르면 옥녀가 머리를 감는 형국인 옥녀세발형이라고 한다.

이런 명당자리에 인열왕후의 백부인 한백겸이 입향했다. 한백겸이 이 마을에 들어오면서 노나라에서 가져온 나무를 널리 심었다고 해서 숲말, 노습, 노림이라 불리게 됐고 이후 15대에 걸쳐 집성촌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6.25때 화마(火魔)입은 노림리

마을입구에는 수백 년 동안 이 마을을 지켜온 느티나무가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 잡는다. 느티나무는 이 마을 청주 한씨 사람들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1919년 3월 19일이었다고 해요. 오씨 성을 가진, 오늘날로 치면 군수쯤 되는 사람이 우리 마을을 지나가게 됐다고 해요. 이때 이 마을에 살고 있던 한범우, 한돈우, 한민우, 김일수 등이 작심하고 군수를 강제로 말에서 끌어내리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답니다.

바로 이 느티나무 아래서였지요” 한윤우(73) 청주 한씨 종친회장의 말이다. 만세사건 이후 한범우는 감옥으로 끌려가 6개월을 살고 풀려났지만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돼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 느티나무는 이 마을사람들에게는 정신적 지주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이 마을은 6.25 전까지만 해도 느티나무 숲과 한씨 종택이 아주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만세사건 때에도 한씨 일가들이 고초를 당하기는 했지만 150호 이상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4후퇴 때 마을 대부분이 불에 타 소실됐다고 한다. "미국 놈들 짓이예요.

그들이 점령했다가 퇴각하면서 이 마을 일대를 전부 불태워버렸어요. 99칸 대종택을 비롯해 수많은 나무와 집들이 잿더미로 변했어요. 당시 불에 타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라곤 나무 열그루 정도밖에 없어요" 한 회장의 말 속에는 분노와 아쉬움이 교차했다.
 
80여 호중 32가구 청주 한씨

한만국(66) 종친회 총무의 안내로 지금은 밭으로 변한 대종택 터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 봤다. 서울에 사는 종손이 복원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라고 한다. "왼쪽으로 보이는 저 영동고속도로 때문에 우리 마을이 일어서질 못해요.

옥녀가 머리를 감으려면 물이 필요한데, 물길을 고속도로가 막아버리고 말았거든. 제방을 쌓아서 물길을 막아버리기도 했고…지금 이 마을엔 80여 호가 살고 있는데, 청주 한씨가 32가구예요. 자식들은 모두 다 외지로 나가 살지요. 내가 이 동네에선 제일 젊은 청년이예요"

종택이 불타면서 이 마을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음력 9월 9일이 되면 전국에 흩어져 사는 후손 200여명이 가마섬으로 가서 제사를 지낸다.

가마섬(佳麻島)은 섬강을 따라 뱃길로 30분 거리인 여주군 강천면에 있는데 한씨 일가 소유다. 워낙 명당자리여서 행여 능이 모셔질까하여 육지임에도 섬 도(島)자를 썼다고 한다. 한백겸의 신도비와 묘, 그 후손들의 묘가 잘 정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당과 제실도 있다.

한 총무는 "어렸을 때지만 종택에 대한 기억이 선명해요. 홍살문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는데 제사 지내는 날은 그야말로 동네 큰 잔치였지요. 왼쪽으로 마구간이 있었고, 오른쪽은 우물이 있던 곳이죠. 대문을 두 군데 지나 절하러 들어가면, 기자라는 분의 모습을 그린 화상이 걸려 있었지요.

은나라 17대왕 무을(武乙)의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주나라가 망하자 조선으로 망명해 후조선을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기자의 41세손 기준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행주 기, 평양 선우, 청주 한이라는 성씨를 붙여 주셨다고 해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기씨와 선우씨랑은 결혼을 하지 않아요"

처음부터 한백겸이 밤개마을 지금의 터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5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 또한 명당이라 그곳에 터를 잡고 집을 지었다.

그런데 섬강을 타고 해적들이 들어와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모든 재물을 훔쳐 달아난 사고가 발생했다. 남자들은 모두 한양에 나가 벼슬을 하며 살고 있던 시절이었다. 부인과 하인들만 있는 집이 도둑을 맞으니 안되겠다 싶어 지금의 이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 터를 잡았던 곳은 해적들 때문에 망했다고 해서 망타골이라고 불리는데 지금도 그 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 부론면 노림리 청주 한씨 집성촌.  
 

어장군 묘와 해적

해적과 관련된 이야기는 꿈과 관련된 이야기로 이어졌다. 유파 한경원이 이곳에 내려와 쉬고 있었던 때라고 한다.

일주일 내내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대장군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 '내 집 좀 지어주시오'라고 하소연하는 꿈이었다고 한다. 하도 이상해서 하인들을 풀어 찾아보니 장군복을 입은 사람이 말과 함께 죽어있더라는 것이다. "병자호란 때 죽은 장군이라고 하더군요. 말도 죽어있고, 해서 한경원이 지관으로 하여금 명당을 잡아 묻어 주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부인이 나타나 자기도 집을 지어달라는 거예요. 옛날에는 전쟁터에 부인을 데리고 다녔었나 봐요. 장군의 묘 옆에 정성껏 묻어주고 지금껏 제사를 지내오고 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99칸 대저택 뒷편 30미터도 안 되는 곳에 어장군의 묘가 있다는 것이지요.

또한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도둑이 들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한만국 씨는 종친회 총무답게 설화처럼 내려오는 조상들의 역사를 소상히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름을 모르는 무명장군이라 어장군이라 부르고 매년 음력 11월 3일에 마을제사를 지내는데, 시루떡을 세 덩이를 만들어 세번 제사를 지낸다. 맨 처음엔 어장군 묘소에서, 그 다음에는 묘소에서 50미터 떨어진 느티나무와 더 아래쪽에 있는 느티나무에서 지낸다.

온 마을이 폐허로 변했던 6.25 때도 어장군 제사만은 지냈다고 하니 이 마을 사람들에게 어장군은 수호신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어장군의 묘에 쓴 비문은 세월이 흐르면서 지워져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청주 한씨이거나 한씨와 혈연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이다. 50년째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이병환(73) 씨도 한씨 부인을 아내로 맞아 이 마을에 정착한 케이스. 40년 넘게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신용섭(73) 씨는 누이가 한 씨와 결혼하면서 이 마을과 인연을 맺게 됐다.

주민 대다수는 농업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 시내버스가 하루에 두번 뿐이어서 교통이 불편한 편이지만 그 덕분에 오랫동안 이곳에 눌러사는 사람들이 많아 가족처럼 인심이 후하다.

   
 
  ▲ 1919년 마을사람들이 만세를 불렀던 느티나무.  
 

 


 

청주 한씨

사적에 의하면 한씨의 시조는 기자의 후예 우량의 32세손 한란(韓蘭, 853~916)이다. 한란은 고려 태조(太祖)가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해 청주를 지날 때 군량미를 도와 삼한 통합에 공이 있으므로 개국벽상공신으로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올랐다. 그는 청주 방정리에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은 청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

청주한씨는 단본으로 고려초부터 명문으로 부상하여 조선조에는 문과 합격자가  273명에 이를만큼 많은 인물을 배출한 씨족이다. 2000년 전국인구조사표에 의하면 19만9천624가구에 64만2천992명이다.

구암 한백겸

1552(명종 7)~1615(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 본관은 청주로 서울서 태어났다. 선조12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부상(父喪)과 조모상(祖母喪)을 당한 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1586년 중부참봉(中部參奉)에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했으나 기축옥사 때 연루되어 유배를 갔다가, 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났다.

이후 호조좌랑, 안악현감, 영월군수, 청주목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기전도(箕田圖)』『동국지리지』『기암유고』등이 있다. 말년에 원주시 노림리에서 살았으며, 묘는 여주시 강천면에 있는 가마섬에 있다.

고민교 객원기자

 

   
 
  ▲ 음력 11월 3일 마을제사를 지내는 느티나무  
 

 


고민교 객원기자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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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론면 노림리 청주 한씨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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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1월 3일 마을제사를 지내는 느티나무

1919년 마을사람들이 만세를 불렀던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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