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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5)판부면 원주원씨 집성촌<하>

1부사라져 가는 집성촌 이상용 기자l승인200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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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부면 서곡1리 내남송마을은 원극겸(元益謙)을 시조로 하는 원주원씨 시중공파(侍中公派) 중 교수공파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전체 30여호 중 20호 가량이 원주원씨였다고 한다. 지금은 뿔뿔히 흩어졌지만 그래도 10호 가량이 원주원씨이다.

이곳에 원주원씨가 정착한 이유에 대해 교수공파 회장을 맡고 있는 원용묵(69) 전 매지초교 교감은 관란(觀瀾) 원호(元昊) 선생의 유언에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내남송마을에 묘역이 갖춰진 원호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며,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내남송마을과 개운동 옛 지명인 송림에 터를 잡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래서 개운동에도 원주원씨 집성촌이 형성됐으나 도시화되며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원호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정충각(旌忠閣)이 개운동 원흥3차아파트 인근에 있다. 정충각은 황주익 전 원주문화원장이 주관해 만들었다고 한다.

내남송마을에는 원용갑 전 금대초교 교장을 비롯해 원용하·원용각·원용식 씨 등 8촌 내지 10촌지간의 원주원씨 형제가 살고 있으며, 한 항렬 아래인 원윤희·원영희·원규희·원태희 씨 등도 사촌지간이다.

이 가운데 원영희, 원규희 씨는 친형제이며, 농협에 근무하는 원광희 씨도 친형제이지만 현재는 분가해 따로 살고 있다.

원용갑 씨 앞집이 원규희 씨 집이며, 그곳에서 불과 50m 쯤 떨어진 곳에 원윤희 씨가 산다. 친인척이 한 마을에서 도란도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원용묵(69) 씨도 내남송마을에 살다 1976년 단구동으로 이사했지만 내남송마을에 농토를 갖고 있고, 교수공파 회장을 맡고 있는 터라 사흘이 멀다하고 마을을 찾는다.

남송 안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내남송이라고 부르는데 야트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여 마을에 들어서면 아늑한 느낌을 받는다. 원용묵 씨는 예로부터 내남송마을 주민들의 심성이 고운 이유가 이같은 마을 분위기에서 연유한다고 믿고 있다.

원용묵 씨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원주시내 사람들조차 내남송마을을 잘 몰랐다고 한다.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인데다 도로라고 해봐야 산을 가로지르는 소롯길이 있을 뿐이어서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았다는 것.

게다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니 외지인 정착이 쉽지 않았던 데다 대부분 친인척간이다보니 이웃간 말썽의 소지가 발생할 일이 별로 없었다.

원규희 씨는 "마을 어르신들은 매일같이 마을회관에 모여 세상 살아가는 얘기를 하며 지내시는데 제사 음식을 풀거나 아니면 회관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등 마을회관은 항상 잔칫집 분위기가 난다"고 전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보니 논농사 보다는 밭농사가 흥했으며, 소를 키우는 집이 많았다고 한다. 원윤희 씨는 "옛날에는 소가 곧 현금이었기 때문에 소를 안 키우는 집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소가 많았는데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적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매년 음력 10월 초이틀에는 원호 선생 묘역에서 시제를 지내는데 이때는 중앙종친회에서 약 100여명이 모인다. 올해는 제544주기로   10월 30일 시제를 지낸다. 요즘에야 당일치기로 모이지만 과거에는 하루 전날 모여 원주원씨 집집마다 진을 치고는 잔칫판을 방불케하는 전야제(?)를 치뤘다고 한다.

모두 종친이다보니 일면식이 없더라도 원주원씨 집이라면 차고 들어가 하룻밤 묵은 후 이튿날 시제에 참가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모이다보니 이때는 원주원씨 집안이 아니더라도 마을 아낙네 모두가 동원돼 시제를 치르기 일주일 전부터 시제음식과 집안손님들을 대접할 음식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마을잔치인 셈이었다.

원용묵 씨는 "소·돼지 잡고, 떡메로 떡을 만들어 동네사람 모두 나눠먹던 인심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교수공파 후손 들은 그로부터 일주일여 지난 뒤 날을 잡아 따로 시제를 지내고 있다. 이때는 약 30명이 모인다.

관란 원호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허(子虛), 호는 관란재(觀爛齎)·무항(霧巷)이며 생육신의 한사람이다. 원주 출신이며 광붕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중량이고, 아버지는 별장 헌이며, 어머니는 원천상의 딸이다.

1423년(세종 5년) 식년 문과에 동진사로 급제, 여러 청관·현직을 차례로 지내 문종 때 집현전직제학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황보인·김종서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게 되자 병을 핑계로 향리 원주로 돌아가 은거했다.

1457년(세조 3년)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영월 서쪽에 집을 지어 이름을 관란재라 하고 강가에 나가서 시가를 읊기도 하고 혹은 집에서 글을 짓기도 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멀리서 영월 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임금을 사모하였다. 단종이 죽자 삼년상을 입었고, 삼년상을 마친 뒤 고향인 원주에 돌아와 문밖에 나가지 않아 다른 사람들이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앉을 때 반드시 동쪽을 향해 앉고, 누울 때는 반드시 동쪽으로 머리를 두었는데 단종의 장릉이 자기 집의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조카인 판서 효연이 수행하는 종들을 물리치고 문밖에 와서 보기를 청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세조가 특별히 호조참의에 임명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한평생 단종을 그리다가 죽었다. 손자인 숙강이 사관이 돼 직필로 화를 당하자 자기의 저술과 소장을 모두 꺼내 불태운 후 아들들에게 다시는 글을 읽어 세상의 명리를 구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이 때문에 집안에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경력과 행적도 전하는것이 없다.

1699년(숙종 25년) 판부사 최석정의 건의로 고향에 정려가 세워지고, 1703년 원천석의 사당에 배향됐다. 1782년(정조 6년) 김시습·남효온·성담수와 함께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정충각(旌忠閣)

관란 원호의 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1703년(숙종 29년) 향리인 개운동에 정여각(旌閭閣)을 건립했으나 6.25 동란 때 파손됐던 것을 1970년 비석과 비각을 재건했다. 비는 높이 2.2m, 폭 52㎝의 화강암으로 비명은 충신관란 원선생정충비(忠臣觀瀾 元先生旌忠碑)이다. 개운동 원흥3차아파트 인근에 있다

이상용 기자sylee@wonju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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