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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1)호저면 경주이씨 집성촌

사라져 가는 집성촌- 무장2리 장포마을 이상용 기자l승인2008.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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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30만명을 넘어서 50만 도시를 꿈꾸고 있는 원주. 도시가 발전하고 개발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많은 변화를 요구받게 된다. 기업도시와 혁신도시가 들어서면서 호저면, 지정면, 반곡관설동 일대 자연마을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이에 원주투데이는 원주의 자연마을들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훼손되기 전에 마을에 담겨있는 역사적 유래와 모습들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특별기획원주마을 탐구를 진행한다.

특별기획은 1부사라져 가는 집성촌, 2부자연마을을 찾아서, 3부변화하는 마을공동체로 약 2년간에 걸쳐 보도할 예정이다.

경주이씨 영장공파 집성촌

호저면 무장2리는 생담마을, 살미마을, 장포마을 등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장포마을이 경주이씨 집성촌이다. 전체 40여호 중 26가구가 경주이씨이다. 장포마을을 장개마을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이 길게 늘어져 있어서 장개라고 부른다. 장(長)은 길다는 의미이고, 개는 포구를 뜻한다.

조선시대 연산군(재위기간 1949∼1506년) 당시 대구에서 진영장(鎭營將: 조선시대 지방군대를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진영에 소속된 정3품의 장관)을 지낸 이은견이 원주에 정착하면서부터 집성촌을 이루게 됐다. 이은견에 대해서는 경주이씨 중앙화수회에서 발간한  「보학총편」에 관직과 함께 명시돼 있다.

이은견의 15대 손이자, 경주이씨 영장공파 종중회 이민우(75) 회장에 의하면 이은견은 당시 세도에 밀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원주로 도피했다. 이은견의 조부가 강원감사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은견은 호저면 산현리 오얏골에서 은거했으며, 자손들이 오얏골 맞은편 장포마을에 모여 살면서 약 500년이 경과한 지금까지 집성촌을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은견의 묘소는 장포마을 앞산으로, 그가 은거했던 오얏골 부근에 있다.

이은견이 진영장으로 재직할 당시 머물던 대구 달성군 하남에는 이은견의 동생이 살았는데, 그 후손들이 번창하며 지금도 대구에 약 2천세대의 경주이씨가 살고 있다고 이 회장은 전했다.

   
 
     
 

500년간 집성촌이 이 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장포마을의 지리적 조건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장포마을은 원주에서 흥원창(지방에 설치한 조창으로, 전년에 거두어 저장한 세미(稅米)를 이듬해 2월부터 4월까지 경창으로 운송하였는데, 흥원창에는 세미의 운송을 위하여 2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 21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다음 가는 뱃나루였다. 흥원창 다음으로 번창한 나룻터가 봉산동 배말이었다. (지금도 봉산동에는 배말타운 아파트를 비롯해 상가간판 등에 배말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이 회장이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소금을 실은 배가 서울에서 출발해 장포마을에 도착하면 횡성군, 영월군 등에서 소달구지에 쌀을 싣고 와서는 소금과 교환해 갔다고 한다. 나무밑 그늘에 소들을 묶어놓고 흥정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고 이 회장은 기억한다. 갈수기 때는 섬강 바닥의 돌을 치워가며 배를 젓기도 했다. 이같이 교역장소로 활용되면서 자연스럽게 저잣거리가 형성됐고, 각종 물품이 풍성해 인근 마을에 비해 번창한 것이 500년간 집성촌이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이 회장은 전했다.

그가 어렸을 때 서울에서 소금을 싣고 온 이들이 숙박할 곳이 마땅치 않아 그의 집에서 하룻밤씩 묵어갔는데, 숙박료는 받지 않고 한됫박씩 받아다 준 술값만 받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뗏목에 나무를 싣고 서울로 팔러가는 이들도 많았는데 마을에 수목이 풍성한 덕분이었다. 섬강과 용곡천 합류지점 밑 강변에 시무나무, 아카시아, 참나무 등이 숲을 이루어 구한말까지 숲속에서 각종 민속놀이가 행해졌고, 서울과 지방간 문화교역 중심지로서 문물 교역이 이뤄진 것이다. 게다가 강물이 범람할 때는 마을을 보호하는 제방 역할도 했다.

그러나 전란과 제방공사, 도로 개설 등으로 숲이 훼손되기에 이르렀다. 시무나무의 경우에는 강변 저지대의 습기가 많은 강과 산림의 인접지에 자생하는 희귀수인데 이곳에선 전국적으로 드물게 숲을 이루고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훼손됐던 것.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지난 2005년 '(사)생명의숲 국민운동'에서 전국 10곳에 선정한 복원대상에 장포마을숲이 포함되며 8천만원을 지원받아 복원에 성공, 지금은 활력을 되찾아가는 중이다.

   
 
     
 

89세까지 장수했던 조부 이규진 씨와 한 집에서 살았던 이 회장은 조부의 기억을 빌어 "경주이씨가 가장 많았을 때는 전체 60호 중 50호가 경주이씨였다"고 전한다. 집성촌의 장점이라면 뭐니뭐니 해도 애경사를 함께 나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동네주민 중 절반이상이 친인척이다보니 설 명절 때는 세배를 다니느라 하루해가 저문다. 특히 초상이 났을 때는 전 주민이 슬픔을 나눴다. 지금도 10촌 이내의 친인척 간에는 세배를 다니는 풍습이 남아있다. 또한 농사일도 너나 할 것 없이 도와주고, 맛있는 음식을 하면 나눠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란다. 도시화·산업화로 인해 도심으로 이사간 이들이 많긴 하지만 지금도 대동계로 이어져 서로돕는 미풍양속은 고스란히 살아있다.

 영장공파 종중회는 지난 2002년 중앙고속도로가 종중 소유의 산을 통과하며 받은 보상금 2억원으로 선조의 위패를 모시는 재실(齋室)인 소운사(召雲祠)를 건립했다. 당시 이 회장은 전국의 경주이씨 사당 50여곳 중 절반정도를 순례하며 사당 각각의 장점만을 취합해 소운사를 건립했다고 밝혔다. 100㎡ 규모인 이곳에는 종중에서 제사를 받들던 선조 12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1일이면 종중 100여명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다.  
 

   
 
     
 

 종중회 이민우 회장

지난 99년 부론고교 교장을 끝으로 교직에서 물러난 뒤 2000년부터 영장공파 종중회를 이끌고 있는 이민우 회장은 선조의 얼과 혼을 하늘같이 여기며 산다.

종중회장을 맡은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선조들의 위패를 모시는 재실을 짓는 것이었다. 이 회장이야 선조들 묘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참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후손들에게도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 50여곳의 경주이씨 사당 가운데 좋은 평판을 받는 25곳을 정해 순례를 다니며 좋은 점만을 발췌, 재실을 짓는데 참고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준공식 때 종중들로부터 아낌없는 칭찬을 받았다. 100㎡ 규모인 재실의 지붕을 덮은 기와는 경주에서 최고품을 공수했고, 문화재기능 보유자가 재실을 지었다고 한다.

장포마을과 단구동에 각각 자택이 있고 실 거주지는 단구동인데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장평마을을 찾는 이유 중 하나가 집성촌인데다 선조들을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근본인 뿌리를 제대로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모두가 갖춰야 할 기본덕목"이라면서 "후손들에게 뿌리의 의미를 제대로 물려줘야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 했다. 

◇무장리 유래
면소재지로부터 4㎞ 떨어진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은 주산리, 서쪽은 매호리, 남쪽은 지정면과 가현동, 북쪽은 옥산리, 산현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동쪽에는 봉천이 흐르고, 서쪽에는 섬강이 흐르고 있다. 지명유래는 무장1리 자연마을인 간무곡과 무장2리 장포의 이름을 한 자씩 따서 무장리라고 한다.


이상용 기자  sylee@wonju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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