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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4)판부면 원주 원씨 집성촌<상>

1부사라져 가는 집성촌- "원주의 절의·애국정신 계승" 이상용 기자l승인2008.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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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주 원씨 운곡파의 대표적 인물인 운곡 원천석 선생 묘역.  
 

원주원씨(原州元氏) 원주종친회에 따르면 원주시민 중 원주원씨 성을 가진 이는 약 2만명이다. 전 원주고 교장인 원순만(68) 원주종친회장은 "다른 지역에서는 원주원씨 성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원주에서는 매우 흔하다"면서 "원주를 본관으로 하는 단일본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60년 국세조사에서 원주원씨는 6만6천18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51위였고, 1985년 조사에서는 10만4천472명으로 전국인구구성비 0.3%였으며, 274성 중 역시 51위였다. 또한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원주원씨는 3만3천655가구로 총 10만9천505명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씨(元氏)는 중국에서 시작된 성씨로 「을축보(乙丑譜)」에는 주나라 문왕의 아들인 강숙의 후손이 원현을 다스렸으므로 천자가 원씨를 사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원주원씨의 시조는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와의 국교 정사화를 위해 파견한 홍경, 지경, 신경 등 경(鏡)자를 이름으로 하는 8학사(學士) 중 한명인 원경으로 천문, 정치, 전쟁, 도덕론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만민에게 예약을 가르치고, 고구려와 당의 국교를 회복시킨 공으로 벼슬이 문하시중 평장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선정을 하던 보장왕이 차츰 이웃나라를 침해하기 시작해 당나라와의 국교까지 깨지게 되자 그는 645년(신라 선덕여왕 14년) 신라로 망명, 상빈 예우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후 원주원씨 계보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어떻게 원주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지에 대한 문헌은 확인할 수 없어 원경을 시조로 하고, 중시조를 1세조로 하는 3개 파로 나뉘게 됐다고 운곡학회 사무국장 원현식(75) 씨는 전했다.

본관은 같이 하면서도 각기 시조를 달리하는 3파는 경을 시조로 하는 '운곡파', 익겸을 시조로 하는 '시중공파', 극유를 시조로 하는 '원성백파'가 있다.

운곡파

운곡파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8학사 중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정착한 경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원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말의 은사 원천석을 들 수 있는데 그는 고려의 대문장가로 이방원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원주로 낙향하여 치악산 밑에 숨어 이름을 감추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뒤에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원천석을 등용키 위해 치악산까지 행차했으나 그는 치악산 기슭의 바위굴로 피신하여 태종을 만나주지 않았다.

태종을 피해 바위굴에서 지은 시조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 5백년 왕업이 목저에 부쳤으니,  /석양을 지나는 객이 눈물겨워하노라.> 하는 망국 고려를 회고한 「회고가(懷古歌」가 유명하다.

원천석 묘역은 행구동 석경사 옆에 있다. 원주원씨 운곡대종회는 원천석 묘역 인근의 종중산 가운데 8천15㎡를 충렬사 복원부지로 무상임대해 지난 3월 충렬사를 착공했으며, 현재 건립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애국충절의 표상인 충렬사에는 3분의 위패를 모시게 되는데 그중 2명이 원주원씨인 원충갑·원호이다.

원충갑은 원성백파, 원호는 시중공파이며, 원천석은 운곡파이므로 원주원씨 원주종친회는 중시조 3개파를 원천석 묘역 인근에 모두 모시게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시중공파

고려 신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시랑을 역임한 익겸을 시조로 하고 원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대표적 인물로는 조선조 생육신의 한사람인 원호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문종때 집현전 직제학에 재직 중 수양대군이 날로 세력을 떨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원주에 은거했다. 그뒤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나 영월에 유배되니 영월 서쪽에 집을 짓고 단종을 그리워 했으며, 마침내 단종이 서거하자 홀로 3년상을 치르고 원주로 낙향하여 두문불출 하는 충정을 보였다.

단종을 그리워하며 지은 그의 시조는 다음과 같다. <간밤에 울던 여울 슬피 울어 지내거다 / 이제와 생각하니 님이 울어 보내도다 / 저 물이 거슬러 흐르과저 나도 울어 보내리다>

세조가 원호를 호조참의에 임명시켰으나 원호는 이에 응하지 않은 채 생을 마감하였다. 1703년(숙종29년) 원주에 정문이 섰고, 원천석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1782년(정조6년) 이조판서에 추증, 원주 칠봉서원 등에 배향됐다.

원호의 묘소는 판부면 서곡1리 내남송마을에 있으며, 개운동에 정충각이, 치악예술관 앞에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 관란 원호 묘역 앞에 세워진 문인석.  
 

원성백파

시조 극유는 고려 태조가 개국할 때 공을 세워 통합 삼한벽상 개국익찬일등공신으로 전의대부병부령을 역임했으며, 원성백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원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대표적 인물은 극유의 10세손으로 고려 충렬왕 때의 명신 부가 추밀원부사를 거쳐 중서시랑 평장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맏아들 관이 찬성사를, 셋째아들 경이 동지밀직사사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또한 관의 아들 충도 찬성사를 역임하고 좌리공신에 책록됐으며, 충의 아들 호가 찬성사로 성안부원군에 봉해졌고 경의 손자 송주가 정당문학을 역임했다.
 
운곡학회 원현식 사무국장에 따르면 지정면 신평리·가곡리, 호저면 산현리, 문막읍 보통리에 원주원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신평리에만 20∼30가구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뿔뿔이 흩어졌다. 또한 판부면 서곡1리에도 집성촌을 이뤘다. 서곡1리는 시중공파 원호의 후손이 뿌리를 내리며 집성촌을 형성한 것으로 마을주민 원규희 씨는 전한다. 서곡1리는 지금도 원주원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상용 기자

   
 
  ▲ 건립공사가 한창인 충렬사. 애국충절의 표상인 충렬사에는 3분의 위패를 모시게 되는데 그중 2명이 원주원씨인 원충갑·원호이다.  
 

 


이상용 기자  sylee@wonju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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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원씨 운곡파의 대표적 인물인 운곡 원천석 선생 묘역.

관란 원호 묘역 앞에 세워진 문인석.

원현식 운곡학회 사무국장

원순만 원주종친회장

건립공사가 한창인 충렬사. 애국충절의 표상인 충렬사에는 3분의 위패를 모시게 되는데 그중 2명이 원주원씨인 원충갑·원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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