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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마을탐구: (8)지정면 한산 이씨 집성촌

사라져가는 집성촌-지정면 간현리 고민교 객원기자l승인2008.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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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현역 앞 전경.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일대에 360호가량이 살았지만 지금은 280호가 산다.  
 

간현역으로 새롭게 태어난 간현리

'한수를 돌아드니 섬강이 어드메뇨, 치악은 여기로다'라는 송강 정철이 지은 싯귀를 읊조리며 간현리로 들어선다. 얼마나 아름다웠기에 섬강이 관동별곡의 모체가 되었을까? 푸른 강물과 넓은 백사장, 삼산천 계곡의 맑은 물에 기암준봉이 병풍처럼 그림자를 드리우는 절경이 펼쳐지며 이곳은 국민관광지가 됐다.

간현역 앞으로 상가가 몇 곳 있을 뿐 여관이라든가 음식점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간현역 바로 앞에서 은혜슈퍼를 운영하고 있는 이진규  한산이씨 종친회장은 말한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일대에서 360호가 넘게 살았지요. 그땐 이 동네가 살아있었어요. 이동인구도 아주 많아 장사도 잘 됐었거든요. 지금은 280호나 될까 그럴거예요 아마. 우리 한산이씨는 6.26전까지만 해도 간현리 인구의 삼분의 일 정도는 됐어요. 지금은 20호 밖엔 안돼."

1942년 중앙선 개통과 함께 간현역이 생기면서 마을은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학교와 면사무소, 파출소 등 관공서가 들어오면서 면소재지가 됐고 외지인이 많이 유입됐다. 그러나 한산이씨 집성촌으로 500여년을 대대로 살아오던 이들은 되려 기차를 타고 외지로 나갔다. 교통이 좋아지면서 외부소식이 발 빠르게 전해졌고,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 보냈던 것이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방 한 칸 월세가 5만원으로 똑같다면 믿기세요? 그런데 사실이예요. 그때는 5만원이나 했어도 방을 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5만원 밖에 안하는데도 텅텅 비어있다니까요. 이렇게 된 것은 8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도로가 넓어지면서 교통이 좋아져서 그래요." 이 종친회장이 말했다.

"맞아요 맞아. 지금이야 이곳 관공서로 발령받은 직원들이 모두들 차로 출퇴근을 하지만, 옛날엔 출퇴근이 어딨어요. 다 여기 관사에서 살거나 집을 얻어 살았지. 그땐 마을이 참 쾌활했었어요." 역시 평생을 이 동네에서 살고 있는 이연창 옹의 말이다.

이 마을은 6.25때 완전히 불타버렸다고 한다. 번영회를 만들어서 구호물자로 집을 짓고 마을을 재건한 것이 지금 남아 있는 모습이란다. 그 이후로 크게 발전하지 않았는데, 요즘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건물을 많이 짓고 있다. 농업에 종사하는 가구가 전체인구의 20% 정도이며, 벼농사와 땅콩, 고추를 주로 재배한다. 여름 성수기 때는 관광객을 상대로 참외, 수박, 옥수수를 판매하기도 한다.

   
 
  ▲ 신도비 바로 옆에 세운 복사비 앞에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왼쪽부터) 이연창 옹과 정대시 옹, 이진규 종친회장이 포즈를 취했다.  
 

입향조, 청백리 간옹 이희 선생

조선 선조 때 이조판서를 지냈던 간옹 이희 선생이 간현리에 은거하게 된 것은 섬강과 소금강이 함께 어우러진 절경 때문이었다고 한다. 간현에는 1경 두몽폭포, 2경 문연동천, 3경 병암, 4경 오형제봉, 5경 은주암, 6경 욕바위, 7경 옥선동대, 8경 베틀굴로 꼽히는 간현팔경이 있다.

이희 선생은 이 일대의 경치가 너무 좋아서 더 나아가지 않고 여기서 '그친다', '머문다' 또는 '머무는 고개'라는 뜻으로 '간현(艮峴)'이라 이름을 붙이고 눌러 살았다. 그래서 자신의 호도 '간옹'이라 했던 것이다. 토정비결을 쓴 토정 이지함과 우리나라에 최초로 고구마를 들여온 조엄 선생도 절경을 못 잊어 자주 찾았다고 한다. 이희 선생은 간현의 한산 이씨 입향조(入鄕祖)이며, 간현리에서 19대손이 이어지고 있다.

'청백리 똥구멍은 송곳 부리 같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청백리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한 관리를 말한다. 조선시대 이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사간원의 수직(首職)들이 추천하여 뽑던 청렴한 벼슬아치를 말하는데 이희 선생이 대표적인 청백리다.

   
 
  ▲ 지은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사당. 살짝 내려앉은 공작새 모양을 하고 있다.  
 

5년 전 사당 지어

1980년대 소도읍가꾸기를 하면서 복개했던 하천도로를 타고 3분정도 가면 잘 지은 사당이 보인다. 단청 칠이 채 마르지 않은 것처럼 산뜻한 사당은 살짝 내려앉은 공작새 모양이다. 지은 지 5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당 뒤로는 맨 꼭대기에 12대조 할아버지를 모시고 있고, 그 아래로 자손들의 묘가 잘 관리돼 있다. 선산 바로 아래에다 사당을 지은 것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신도비문이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나도 잘 몰라요. 하지만 비막을 세우기 전까지만 해도 여러군데서 소문을 듣고 와서는 탁본해 가더라고. 2004년에 똑같은 복사비를 세운 것이 바로 저것이예요." 이 종친회장의 말이다. 비막을 세운 신도비문은 머리 쪽에서부터 마모가 시작되고 있으며, 벌써 여러 군데 상처를 입었다. 촘촘히 비막을 세운 덕에 글씨를 잘 알아볼 수가 없어 바로 옆에 세운 복사비로 발길을 옮겼다. 빽빽한 한자로 된 비문이라 알아볼 수 없기는 매 한가지였지만, 마모되기 전에 복사비를 세운 것은 매우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제사는 일 년에 한번 지낸다. 사당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체계가 잡혀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매년 음력 시월 초이튿날 시제를 지내는데 요즘은 100명 안팎 모인다. 유건 쓰고, 도포입고 갖출 건 제대로 갖춰 입는다. 사당관리는 이헌구(58) 씨가 맡고 있는데, 단구동에 살면서도 수시로 이곳을 들른다.

   
 
  ▲ 언제 세워졌지도 알 수 없는 신도비문. 비막을 세우기 전까지 탁본해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사라진 집터

6.25전쟁의 참상이 큰 이유 중 하나는 소실돼 버린 문화재가 많은 까닭이기도 하다. 대대로 마을을 지탱해오면서 지주역할을 하던 대종가집이 불타버린 것도 역시 6.25때라고 한다. 이 종친회장의 집에서 차로 3분이면 가는 거리에 있지만, 앙상한 나무가 신산스럽게 서 있을 뿐이다. 

"문중 땅이지만 새로 집을 짓지 못하고 있어요. 누가 선뜻 나서서 일할 사람이 없기도 하고. 우리는 이제 나이가 많아 일을 만든다는 것이 쉽지 않거든요. 젊은이들은 모두 외지에 나가 살잖아요." 이 종친회장은 입향조인 이희 선생이 살던 집터를 가리키며 회심에 젖는다. 500여년을 견뎌오던 집터에서 집이 사라진지 60여년이다.

"저 집에서 산을 타고 걸어가면 정자말이 나와요. 이희 선생이 강에서 낚시를 하면서 쉬었던 곳이라 해서 정자말이라고 부르지. 이 동네에 있는 이름은 이희 선생과 연관된 것들이 많아요"라고 이 종친회장은 전했다.

원주시종친회장은 이창복 전 국회의원이다.

고민교 객원기자

간현을 빛낸 한산이씨

   
 
  ▲ 이진규 종친회장  
 

이만규(1888~1978)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분이다. 간현리에서 출생했다. 1906년 서울 경성의학강습소(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5년간 공부했고, 1911년 졸업과 동시에 개성에서 외과의사로 활동했다. 일제 말기에는 흥업구락부사건에 연루돼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 기간 동안 서적 '조선교육사'에 대한 집필구상을 했고, 출옥한 후에 완성했다. 1948년 6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 근로인민당 대표로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갔다가 평양에 남게 되었다. 북한에서의 활동은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철경(李喆卿·1914∼1989) 선생은 이만규 선생의 셋째딸이자 전 서울고교 교장이었던 교육자 서정권의 부인으로, 가수이자 방송인인 둘째아들 서유석 등 3남2녀의 어머니로, 40년을 교육자로, 60년을 예술가로, 수십 년을 여성운동가로 일인 다역의 삶을 살아온 추앙받는 모범여성이다.

이밖에도 간현리가 배출한 인사는 많다. 전 국회의원이었던 이창복 씨, 남북조적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동복 씨, 전 적십자회장이었던 이윤구 씨, 방송통신대학교 총장이었던 이찬교 씨, 그리고 원주시 초대교장을 지냈던 이철교 씨 등이 있다. 명성황후 생모도 한산이씨다. 
 
한산이씨 유래

한산이씨는 한 뿌리에서 각기 씨족을 달리하는 두 파로 분화되었다. 한산이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호장공계의 시조는 고려 숙종 때 권지호장에 오른 이윤경(李允卿)이다. 이윤경은 한산지방에 토착하여 세거해온 호족의 후예로 고려 중엽에 향리의 우두머리인 호장을 역임했고, 5대에 걸쳐 호장직을 세습하여 오면서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중시조는 목은 이색의 아버지인 이곡(李穀)이다. 이곡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당대의 대문장이며, 우탁 이동,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경학의 대가였으며 고려 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에도 급제하여 벼슬이 도첨의찬성사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그의 문하에서 권근·변계량 등의 학자와 명신을 배출하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의 아들 목은 이색이 1362년 홍건적의 난에 왕을 호종하여 공을 세워 한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한산으로 하였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한산이씨는 4만2천여가구에 모두 13만6천여명이 살고 있다.

 


고민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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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세워졌지도 알 수 없는 신도비문. 비막을 세우기 전까지 탁본해 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지은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사당. 살짝 내려앉은 공작새 모양을 하고 있다.

신도비 바로 옆에 세운 복사비 앞에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란 (왼쪽부터) 이연창 옹과 정대시 옹, 이진규 종친회장이 포즈를 취했다.

이진규 종친회장

간현역 앞 전경.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일대에 360호가량이 살았지만 지금은 280호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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