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시청각실, 그때는 영사기를 돌렸던 것도 같다. 6학년 학생들을 모아놓고 외국여성의 임신과 출산장면을 보여주었던 것이 내가 첫 번째로 기억하는 학교 성교육이다. 

30년도 더 전의 일이다. 그때의 충격과 공포는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서 나의 청춘에 영향을 끼쳤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에 성관계는 임신과 출산으로 자동 연결되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핵심은 아마도 "이제 너희들도 임신 가능한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 전에 성관계를 하면 안 된다."였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 여학생이 성교육강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십 수 년 째 "당당하고, 안전하고, 즐거운 성"을 가르치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성적인 존재다. 그것은 성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성교육이 영어, 수학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더 중요하고 필요한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위해서 배워야하는 예의와 도덕이 있듯이 성도 제대로 배우고 익혀야만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스스로 당당하고 안전하고 즐겁게 자기의 성적권리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릴 때부터 성·인권교육이 정규과목으로 채택이 되어 있지 않아 나이와 발달단계에 맞는 체계적인 교육이 제대로 안 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4대악 근절을 국정과제로 내세우며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을 없애겠다고 약속했지만 성폭력사건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교사들이 학생과 동료교사를 집단적이고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사실이 밝혀져 교육부가 발칵 뒤집혔다. 이제는 마음 놓고 자녀를 학교에도 보낼 수 없다고 개탄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교사들도 심각성을 인지하면서 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교육부가 올해 3월 내놓은 '학교 성교육 표준안'의 내용이다. 

교육부 학교성교육표준안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전 학년의 아동청소년에 시행될 성교육의 표준안으로써 앞으로 이 표준안이 전국의 모든 교육기관에서 사용된다면 아동·청소년의 성 인식과 성적자아 형성에 큰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이 표준안은 교육부가 2년간 6억원의 예산을 들여 만들었다는데 성평등감수성을 길러주긴 커녕 성차별과 성폭력의 통념을 강화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성적 다양성과 다양한 가족형태를 배제함으로써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담고 있다.
표준안은 교육 시 외부강사들도 '야동', '자위' 등 학생들이 주로 쓰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성행위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금욕을 강조하며, 남성의 성에 대한 욕망은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충동적으로 급격하게 나타난다고 기술하고, 데이트 성폭력의 원인을 남녀 간 데이트 비용의 불균형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성폭력 예방법으로는 여성의 적절한 대처가 중요하다고 반복적으로 서술해 마치 성폭력의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편견을 심어줄 우려도 있다. 

청소년들은 실질적인 성교육을 요구하는데 교육부는 오히려 보수성을 강화해서 마치 30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이번 표준안을 만들면서 교육부는 현장에서 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어떤 단체와도 심지어 국가교육기관인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과도 사전협의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러니 청소년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시대착오적이고 비현실적인 표준안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교육당국은 청소년을 성적주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사회처럼 불법인 성매매가 남성들의 집단문화로 인식되고 전 국민이 인터넷에서 음란물에 늘 노출되는 상황에서 청소년의 성을 통제하겠다는 발상이 놀라울 뿐이다. 

한쪽에서는 성을 터부시하고 통제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온갖 성산업이 성행하는 왜곡된 성문화가 계속되는 한 성폭력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인권의 존중이 아니라 차별과 배제, 혐오를 조장하는 '학교성교육표준안' 폐기를 위한 민원제기에 동참하는 것이 성폭력예방을 위한 우리의 시작이다.

정유선 강원여성연대 공동대표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