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불이익을 안고 과연 평등의 세계주의(世界主義)로 갈 수 있는 걸까? 허구요 망상이다."

　15~16년쯤 지난 일인 것 같다. 사위가 옥살이할 무렵, 정릉(貞陵)집에는 외국기자(外國記者)들의 출입이 더러 있었다. 기억이 확실치 않지만 반소매 셔츠를 입었던 것으로, 여름이었을 것이다. 워싱턴포스트지의 늙수그레한 기자 한분과 뉴욕타임스라고 했는지 잽싸게 뵈는 젊은 기자, 그 두 사람과 함께 온 사진기자는 일본인(日本人)이었다.

　그때 집안 형편은 폐가(廢家)나 다름없었다. 여러 가지 상황도 절박했지만 수리를 하다가 중단(中斷)한 거실(居室)에는 뼈다귀처럼 시멘트벽돌이 드러나 있었고 시꺼멓고 무지무지하게 큰 쥐들이 대낮, 사람이 있는데도 그 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끔찍한 상태였다. 책은 이곳 저곳 짐짝같이 쌓여 있었고 더러는 책장에 꽂혀있기도 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고 말하고 싶지도 않은 세월이다.

　생각만 하면 가슴앓이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 손주 원보가 아니었더라면 우리 모녀에게 그 시절은 죽은 시간이었을 것이며 어린 영혼의 빛 한줄기가 오직 구원이었을 뿐이었다. 할머니가 원보를 키웠다기보다 원보가 할머니를 지켜주었다. 한승헌(韓勝憲) 변호사의 말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아마도 그 고난의 내력을 끝내 얘기하지 못하고 갈 것이다. 얘기하지 못하고 묻어두어야 하는 현실과 사정을 생각할 때 지금도 분노에 몸을 떨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째서 악(惡)은 아직도 벌 받지 못하고 있는 걸까! 참으로 용서하기가 어렵구나! 아아 이래서는 안 되지! 빨리 지난날 얘기를 끝내야겠다.

　젊은 기자(記者)는 서두르며 사진기자에게 사진 찍기를 재촉했다. 낯선 사람들에게는 굼뜬 우리 성격 탓도 있었고 찾아준 손님에게 친절을 베풀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자연 딱딱해진 표정을 풀지 못하는 우리의 처지를 이해한 듯 늙스그레한 기자(記者)는 서둘러대는 젊은 기자에게 약간 비난 섞인 시선을 보내다가 딱해하는 듯 한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바라보곤 했다.

　그랬는데 사진을 찍던 일본인기자가 "아, 일본책이 있다!"

　나직히 말한 것이었지만 그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이었다. 뭐랄까 얕잡아본다고나 할까, 선진문화국(先進文化國)이란 자부심에서 오는 일본인 특유의 유치한 몸짓이 베어나온 것이다. 그의 시선을 끈 것은 고단사(講談社)에서 발행(發行)한 일본미술(日本美術)의 사진집이었으며 딸아이가 불교미술(佛敎美術)을  전공했기 때문에 불상(佛像)에 관한 것 두 권이 있었던 것이다. 그 것 말고도 쌓여진 책 더미 속에는 상당수의 일본책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거의가 일본어로 번역이 된 외국책들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말했다.

　'일본미술전집 첫 권 첫 페이지에 나와 있는 불상을 아는가. 그게 바로 우리 민족의 얼로서 제작된 광륭사(廣隆寺) 미륵반가사유상이다. 자네 나라의 국보 1호란 말일세. 왜 그리 성급하게 오해를 하는겐가'

　재작년, 아니 88년이니까 그보다 더 되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일본의 평론(評論)하는 아무, 아문데 만날 수 있겠느냐는 내용의 전화였다. 다 같이 문학(文學)하는 처지, 못 만날 이유가 없고 좋다고 했는데 며칠 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언제쯤 찾아가는 게 좋겠느냐는 상대방 얘기였다. 항상 집에 있으니까 내일이라도 상관없다, 했더니 내일 문예지(文藝誌)의 편집장이 오기 때문에 모레면 어떻겠느냐며 다시 물었다. 순간 단순한 내방(來訪)이 아닌 것을 깨닫고 그때야 무슨 용무냐고 물었다.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대답이었다.

　인터뷰라면 안한다고 했더니 한참 있다가 그럼 그냥 찾아가겠노라 해서 용건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면 상관없다고 응낙했다. 그런 점에서는 약속을 잘 지키는 일본인의 습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예(文藝)>라는 문학지(文學誌)의 편집장(編輯長)과 통역을 위한 한국인 여성과 학생, 그리고 젊은 평론가(評論家) 가와무라미나토(川村湊) 씨 네 사람이 약속된 날 원주(原州)로 찾아왔다. 가와무라(川村) 씨는 촌사람같이 선량하고 소박해 보였다.

　키가 좀 큰 편집장은 그런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된 분위기는 아니었고, 보기에 따라 매우 냉철한 것 같으면서 선량한 약점이 있는 것  같이도 보였다. 나는 내 자신을 소개하기를 "철두철미 반일작가다." 두 사람은 약간 놀라는 것 같았다. 왜 충격을 받을까? 전에도 그런 얘기는 했었고 일본인들은 가만히 듣는 것 같았다. 그러나 깨달았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반일(反日)을 당연하다고 본 그들은 이제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그들과 나는 꽤 오랜 시간 얘기를 했다. 남경(南京)학살 사건에 관한 말이 나왔을 때 그들의 안색은 변했고 실은 겁이 많은 것이 일본사람 아니냐 했을 때는 당혹해 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손님에게 너무 무례했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그들이 지식인(知識人)이라는 신뢰(信賴)가 있었다. 지식인(知識人)끼리는 옳고 그른 차원에서 얘기가 되어져야 하는 것으로 믿었고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들과 내가 만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평론가나 편집인이나 작가는 뭐하는 사람인가, 적어도 진실(眞實)에, 사실에 접근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인 것이다. 내심으로 찝찔했겠지만 그들은 과히 기분 나쁘지 않게 돌아갔다.

　얼마 후 잡지 <문예(文藝)> 하계호(夏季號)가 일본에서 왔다. 그들이 말한 대로 인터뷰는 취급하지 않았고 가와무라(川村) 씨의 '반일(反日)과 향수(鄕愁)의 틈새'라는 평론(評論)에 내 얘기가 삽입 되어 있었다. 제목(題目)이 몹시 불쾌(不快)했지만 내용은 날카롭고 일단은 공정한 입장(立場)에서 성실하게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한국(韓國)의 반일(反日)에는 항상 역사(歷史)를 동반하며 그것을 증인(證人)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유의(留意)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들 일본인은 소위 역사적(歷史的) 교훈(敎訓)을 배우지 않는 민족(民族)이기 때문이다. 혹은 역사(歷史)는 역사(歷史)로서 현재와 무연한 것으로, 방편(方便)으로 씌여지는 정신적 기술이 고도(高度)로 발달(發達)되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만세일계(万世一系)를 주장해온 천황(天皇)의 역사(歷史), 다시 말하자면 역사(歷史)로서의  천황(天皇)을 의미하고 있으며 같은 일본인의'역사성(歷史性)'이야말로 근린제국(近隣諸國), 제민족(諸民族)에게는 지극히 수상쩍게 보일 것이다."
　
　가와무라(川村) 씨의 지적은 타당하고 평론가로서의 신뢰감을 내게 안겨주었다. 바로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인근 민족에게만 수상쩍은 것은 아니다. 일본인 자신에게도 수상쩍은 것이다. 일본인의 역사성(歷史性)이 인근 민족에게 피해를 준 것처럼 일본인의 의식을 꽁꽁 동여맨 허위의 포승으로 피해자인 것은 매일반이다.
　
　"박경리(朴景利) 씨의 <토지(土地)>는 근원적으로 '대지(大地)'를 소유하고 사유(私有)한다는 근대적(近代的)인 토지소유의 관념 그 자체에 대한 의의(疑義)를 머금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물론 국유지라는 개념의 확대(擴大) 부연하면 경작자(耕作者)로서의 조선(朝鮮)농민으로부터 토지(土地)를 빼앗은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에의 비판이기도 하지만 그 기층(基層)에 있는 것은 토지(土地)란 누구의 것이냐 하는 근대적(近代的)인 경제사회 그 자체를 흔들어대는 물음인 것이다."
　
　<토지(土地)>를 농민소설로 간주하려드는 일부 시각에 늘 쓰거움을 삼킬 수 밖에 없었고 구차스럽게 그것에 대한 설명을 하다가도 그러는 내 자신에 짜증을 내곤 했었는데 작가의 의중(意中)을 여실(如實)히 표현해준 가와무라(川村) 씨가 고마웠다. 그러나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하여 그 구절을 인용한 것은 아니다. 조선(朝鮮)농민으로부터 토지(土地)를 빼앗은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에의 비판이기도 하지만 그 기층(基層)에 있는 것은 토지(土地)란 누구의 것인가 하는 근대적(近代的)인 경제사회 그 자체를 흔들어대는 물음이라는 가와무라(川村) 씨의 말, 여기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있지만 다른 표현으로 되풀이해 보면 민족주의 반일(反日)의 동기와 민족주의 반일(反日)의 목적, 그것에는 다 사람의 생존을 저해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필연성이 있는 것이다. 즉 삶의 터전인 땅이 토지(土地)라는 소유의 개념으로 변하면서 역사(歷史)는 투쟁과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고 작게는 개인에서 민족, 크게는 인류 모두가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한일합방(韓日合邦)을 전후해서 2차대전(二次大戰) 종결까지, 제국주의 식민지시대는 가장 가혹한 땅의 유린과 생명 학살의 도가니였고 우리 민족은 살아남기 위해 민족주의의 불꽃을 간직해야만 했다. 그러면 광복 후 우리는 민족주의를 극복해야만 했는가. 그렇지가 않다.

　역사는 시작되었고 근세(近世), 반(件)세기 동안 약자는 삶의 터전을 잃었으며 국토가 유린당하고 민족이 살육 당했던 제국주의 식민시대 죽지 않기 위해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우린 민족주의 반일사상(反日思想)의 불꽃을 간직해야만 했다. 그러나 광복 후 과연 민족주의 반일(反日)사상은 쓸모없이 되었는가? 그렇지가 않다. 세계의 현실은 여전히 약자(弱者)의 호주머니를 강자는 털어내고 있으며 아흔 아홉 섬의 곡식을 가진 자가 한 섬 가진 자로부터 빼앗아 백 섬을 채우려는 이것이 오늘날의 민족과 민족간의 현실인 것이다.

　뿐인가. 영토(領土)의 침략보다 더욱 악성(惡性)인 것은 땅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장본인(張本人)은 누구인가, 이득을 많이 챙기는 자다. 많이 벌어들이는 만큼 땅을, 지구를 파괴하고 황폐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팽창주의는 과거와 다를 것이 없다. 그 해악도 다를 것이 없다.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무관심을 나타내는 일부 지식층의 이상주의(理想主義) 혹은 지성(知性)을 나는 지적(知的) 허영으로 본다. 토지(土地)의 일본인(日本人) 오가다지로(緖方次郞)는 코스모폴리탄이다. 그는 강자(强者) 편에서, 가해자(加害者) 편에서 양심을 지켜 비판하는 세계주의자(世界主義者)다. 그러나 피해자가 불이익을 안고 과연 평등의 세계주의(世界主義)로 갈 수 있는 걸까? 허구요 망상이다. 한국인의 반일(反日)이 모두 그런 논리에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분풀이라는 본능적(本能的) 감정인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정치적 차원이지만 일본인의 의식(意識)도 간과할 수 없는 만큼 일본은 왈가왈부 할 처지가 못 된다. 그것은 과거의 잘못보다 오늘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국인의 분을 풀어주지 않았다.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피해였지만 그들은 거의 보상하지 않았다. 사과 조차 하지 않았다. 통분(痛憤)이 무슨 사과인가? 그러고도 욕을 안 먹겠다는 것은 뻔뻔스런 일이다. 가와무라(川村) 씨는 한글세대는 반일(反日)이라는 대전제(大前提)를 전면(前面)에 세우고 있으나 구체적(具體的) 체험과 연구 관찰이라는 기회를 가지지 못하고 다만 반일(反日)이라는 민족교육으로 길러진 지식과 근본적 이미지에 의해 일본을 단죄(斷罪), 규탄하는 태도를 가지기 일쑤다 했는데 동감(同感)이다. 그러나 동감의 뉘앙스는 상당히 다르다. 도식적인 교육(敎育)을 떠나 생생한 역사적(歷史的) 사실, 역사적(歷史的) 입김에 접할 수 있다면 한글세대는 무조건 감정적 시비를 떠나 조목조목 따지고 넘어가는 사상적 강화(强化)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일본의 전후세대(戰後世代)도 우리 한글세대에 대한 불만(不滿)을 사실에 입각하여 반박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관찰하고 연구해야만 한다. 대로(大路)는 결코 일방통행(一方通行)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가와무라(川村) 씨의 성실한 우려를 나타낸 말이 있다.
　
　"그것은 커다란 틀 속을 말한다면 서로 근대화(近代化)를 절대(絶對)로 하고 그것에서 뒤떨어지는 정도에 따라 서로가 서로를 비웃는 것 같은 구조(構造)가 극동(極東)의 아시아 속에 낭질(狼疾)과도 같이 끼워 맞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양국간의 증오가 지극히 저질(低質)상태인 것을 말하려고 했다기보다 그것은 엄청난 문화의 후퇴를 의미한다. 그것은 결코 민족간의 대립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세계가 그릇된 방향으로 파멸의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물질(物質)보다 정신(精神)의 측면에서 우려로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에서 나는 뜨거운 동지애를 느꼈다. 인간(人間)이 인간(人間)으로서 가장 귀한 것을 포기하고 경제적 동물로, 의식의 야만시대로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을 말한다. <끝>

　지금까지 박경리 선생 유고산문 일본산고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원고를 선뜻 내어 주시고 감수까지 맡아주신 김영주 관장님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