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순  (전 원주여성민우회 사무국장 )

부실도시락이며 건빵도시락 사건이 남의 일 같지 않게, 방학이면 아침에 만들고 나온 주먹밥 몇 개로 점심을 때울 수밖에 없는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 땜에 이래저래 맘이 쓰이고 경황없는 날들을 보내느라 명절이 코앞에 닥친 걸 잊고 있었다. 아침에 펼쳐든 신문사이로 설 명절 선물세트를 홍보하는 광고지를 보고서야 몸에 오래 밴 습관처럼 더럭 한숨이 나온다.
시아버님 돌아가시고 최근 들어 시어머니마저 거동을 못하시게 되면서 명절노동의 부담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추석’이니 ‘설’이니 하는 단어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지금이야 미리 손 많이 가는 음식을 준비해 오고 하루전날 모여 저녁식사는 가족들이 돌아가며 외식을 내고 아침에 차례 지내고 성묘를 다녀와 점심 먹고 헤어지는 조촐한 행사가 되었지만 이렇게 된 것도 겨우 이삼년 전부터다.
내가 결혼을 했을 때만해도 시댁은 그을린 서까래가 올려다 보이는 부엌에서 가마솥에 장작불을 때던 그런 집이었다. 시어머니는 구부러진 허리로 명절 한달도 더 전부터 술을 빚어 놓고, 광에 몇 상자씩 과질을 만들어 놓으셨다. 자식들이 오면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 한가득 갈아놓은 콩물을 젓고 힘 좋은 아들들은 물기를 빼 두부를 만든다. 담그어 둔 술을 항아리에서 퍼 나르고 뜨끈뜨끈한 순두부가 한 그릇씩 나누어지면 ‘그래 이 맛이야’를 연발하며 형제들은 벌써부터 취기가 오르고 어머니는 그간 찬 얼음물에 손 얼어가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픈 고된 노동의 고통을 일시에 잊고 만다. 그런 어머니셨다.
남편은 아직도 사천한과다 무슨 한과다 해도 어머니가 만드셨던 한과만큼 맛있는 음식이 없고, 어느 두부 전문집을 가도 명절이면 먹던 두부 맛을 따라 올 곳이 없다고 아쉬워한다. 그러나 나에겐 술 빚고 두부 만들고 한과까지 만드는 시댁의 명절음식은 안 해도 되는 연장근무 내지는 과중한 추가노동일 뿐이었으며 한 번 맛있게 먹자고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해야 하나 하는 억울함 그 자체였다.

적어도 이젠 명절하면 언론에서도 명절스트레스니 명절증후군이니 하는 제목을 달아 여성들이 겪는 과중한 명절노동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남자들은 명절연휴를 광고카피처럼 TV와 함께 보내거나 명절이면 고향친구 만나러 나가 차례 지낼 시간이 다 되어서야 들어오거나 하는 대신 여자들은 시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명절 연휴가 끝날 때까지 엉덩이 한번 붙일 사이 없이 차례 준비에 대식구 식사 준비에 술상 차림에 손이 마를 날이 없다. 이러한 노동의 불공평함이 결혼한 여성들의 명절스트레스의 주요한 원인이니 남자들이여 장도 같이 보고 설거지라도 하라고.

그러나 평상시에 성별분업이 굳건한 상태에서 명절 날 노동의 분담을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보다 더 여성들이 중요하게 지적하는 것은 남성중심적인 명절문화로 인한 소외감과 절망감이다. 일단 아들을 중심으로 모여들고 역시 남편의 조상에 대해 제사를 지낸다. 남의 조상 제사 지내기 위해 일한 것도 억울한데 그 앞에다 대고 절하는 것은 더더욱 싫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제사 그 자체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도 한다.

제사라는 것이 어머니의 조상은 완벽하게 제외시키고 아버지의 조상들만을 조상으로 인정하고 모시는 것으로 남성중심의 가족제도라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부부들이 명절을 전후해서 싸웠을 것이고 싸울 것이며 이것이 쌓여서 이혼까지 가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명절노동을 분담하는 것만이 평등한 명절, 모두가 웃는 명절을 만드는 전부는 아닌 것 같다. 그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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