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종진  언론인

지난 9월 충주의 엄정면에 사는 지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그 분의 부탁으로 홍고추를 엄정농협에 수납해준 일이 있었다. 초행길이라 물어 물어 농협을 찾았으나 주차할 데가 없어 쩔쩔매고 있는데 마침 청사에서 나오던 농협직원이 이를 보고 용무를 묻기에 홍고추 수납 때문에 그런다고 했더니 깨끗한 남방셔츠 차림에도 불구하고 한참 걸어야할 수납장까지 무거운 고추자루를 둘러매고 직접 수납을 시켜주지 않는가. 게다가 주차할 곳까지 친절히 일러주면서 말이다. 이 직원은 자기가 손수 가지고 가지 않고 그저 수납장소를 가리켜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할 일은 다 했다고 할 수 있는데 …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필자는 황량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시원함과 뿌듯함에 가슴 벅찼고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무척 기분이 좋을 정도로 여운이 남아있다.

필자가 이토록 사소한 일에 집착하는 것은 내 자신이 50년대 말 이동조합이 이 나라에 처음생길 때 겉보리 한 말로 출자한 묵은 조합원 이었는데다 농협의 금융기관화로 실종된 조합주의의 편린을 그로부터 발견했기 때문이다. 창립당시 이동조합 서기들은 거의 매일 조합원 집을 돌면서 시장에 내다 팔 농산물을 거두어 판매 해주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운반수단도 지게나 손수레가 전부였지만 귀찮아하지 않고 열심히 일해 조합원들이 한가족처럼 여겼다. 모두가 자기네 머슴처럼 부려먹고 보수라야 일년에 벼 몇 가마 주는 것이 고작이지만 사명감을 가지고 묵묵히 일했다. 그런 농협이 장족의 발전을 해 규모도 커졌을 뿐 아니라 임직원들의 연봉도 수억 대에서 수천 만원에 이르고 그것도 부족해 임금투쟁을 하는 형편이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그러나 비대해진 농협에 비해 우리 농촌실정은 해를 거듭할수록 피폐해져가니 농촌부흥을 위해 만든 농협은 그 동안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 쌀 시장 개방 반대를 외치며 천막농성중인 춘천의 李모씨(37)는 「UR 뒤 정부는 농업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며 40여조 원을 들였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경쟁력증진은 온데간데없고 빚만 늘었다」고 하소연했다. 통계청에 의하면 1993년 810만원인 도내 1인당 농가부채도 1997년 1천452만원, 2000년 2천386만원,2003년 2천908만원으로 10년 사이 4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렇게 되기까지 농협, 농정당국, 정치권 등 어디서도 내 까닭이요 하고 책임을 지고 나선 곳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농민들을 더욱 분노케 하고 있다. 요즘 농정계나 정치권에서 농협 법 개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 ▷농협구역 종복허용 ▷조합장 연임제한 ▷대표이사 등의 임기 ▷중앙회장 권한조정 ▷신·경분리(부칙)가 주요쟁점이 되고 있지만 정작 농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아무리 제도를 완벽하게 뜯어고쳐도 농민과 농촌을 사랑하는 마음이 거기에 담겨있지 않으면 모두 공염불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70년대 중공업화 당시의 탈농업, 농업경시의 사조가 아직도 기저에 깔려있는 한 농업회생은 사막에서 물을 찾기만큼 어려운 일이란 것을 너무나 잘 아는 까닭이다. 현재 농민들은 외부의 개방화 압력과 내부의 농업 홀대풍토로 고립무원의 어려운 처지이다. 농협은 순수조합주의로 다시 돌아가 가족 같은 사랑으로 상처받는 농심을 쓸어안아야 한다. 그래서 농협과 임직원들은 향수 어린 「우리조합」「우리서기(書記)」란 옛 애칭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지금의 농협은 농민들에게 너무 낯설 만큼 도회지화 되어, 촌스러운 구석이 하나도 없다. 으리으리한 건물과 은행 같은 깔끔한 내부, 세련된 고 임금의 직원들 어디에도 흙 냄새나는 곳이 하나도 없다.

필자가 80년대 말 농협의 민주화와 체질변화를 주제로 월간태백이란 잡지에 기고하면서 농협 임직원의 귀족화, 조합주의 상실 등에 대해 호되게 비판한 적이 있었다. 당시 도내 농협은 매월 매장에 비치하던 그 잡지를 비판기사 때문에 그 달만은 내놓지 않았을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조합원들이 봐서 좋을 게 없다는 짧은 생각이 문제의 잡지를 매장에서 격리시켜 놓은 것이다. 뒤에 그런 일을 확인하고 실소를 금치 못했지만 마음 한편으로 우리농협의 자질과 능력의 한계를 보는 것 같아 얼마나 씁쓸한지 몰랐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서 또 비슷한 내용의 글을 쓰게되니 필자의 착잡한 심정 이루 말할 수 없다.
농협 법 개정에 앞서 조합원 위주의 순수 조합주의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지금 농협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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