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동안 일기 쓴 정기섭 옹

6.25 때 일부는 소실 교장퇴임후 한문 가르쳐



“일기가 이제는 지금까지 살아온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도구가 됐다”

70여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써온 정기섭(87·일산동) 옹. 그는 요즘도 하루 일과를 일기로 마무리 한다.

수필가 이하윤이 그의 수필 ‘메모광’에서 “내 메모는 내 물심양면의 전진하는 발자취며, 소멸해 가는 전 생애의 설계도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정 옹에게 있어 일기는 인생의 꼼꼼한 기록이자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설계한 도구이기도 하다.

그가 일기를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12살 때인 초등학교 5학년.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내던 그는 어느 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읽게 됐고 이를 계기로 일기쓰기 대장정을 시작해 지금도 이어 가고 있다. 병원생활을 하면서도 일기 쓰는 일을 거르지 않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해 그 날 일기를 쓰지 못하면 며칠 지난 후에라도 그 날 일을 회상해 일기를 썼다.??

그는 “난중일기를 읽으며 일상의 평범한 기록이 후대에 좋은 귀감이 될 수 있고 스스로에게도 많은 보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일기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그가 갖고 있는 일기는 모두 30여권.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6.25발발 직전까지 쓴 일기는 난리통에 소실됐고 현재 갖고 있는 일기장은 그 이후에 쓴 것이다. 50년대 쓴 일기장은 이제 글씨가 마모됐을 정도이다.

그는 한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횡성군 공근면 출신인 그는 춘천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홍천군 동면 좌운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해 1985년 호저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1995년부터 2004년까지는 대안노인회 원주시지회장을 역임했으며 원주문화원에 12년째, 원주평생교육정보관에 10년째 출강, 주부 등을 대상으로 한문을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인생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그의 일기에는 교육을 하면서 느낀 소감과 시대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하다. 개인 또는 가족 대소사를 기록하는 것은 기본.??5남3녀의 자녀들과 15명의 손자·손녀들에게도 그의 일기 쓰기는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90을 바라보는 나이에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물어오면 당연히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써온 일기라고 답한다”며 “내 몸처럼 약해지고 글씨마저 희미해진 일기장이지만 나의 분신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30년 전 오늘은 과거가 아닌 현재로 생생하게 남아 있다.
김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