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미숙(주부)

어릴 때는 명절이 참 좋았고 참으로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맛있는 음식과 평소엔 눈요깃감으로 그쳐야 했던 노란 바나나, 밥 먹을 때마다 십 수 명이 함께 하는 북적거리는 집안 분위기. 그래서 명절 일주일 전부터 괜히 맘 설레고 들떠 지냈었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히 안주인의 고된 노동과 헌신적인 희생의 산물이란 걸 알게 된 것은 안타깝게도 내가 안주인이 된 후였다. 그제서야 왜 어릴 적 엄마가 넌 장남한테는 안 보낸다고 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명절이 얼마 안 남았네’ 하면 아이들은 빨간 날이 많다며 앗싸! 하며 신나 하지만 아줌마들은 한결같이 낮은 한숨소리가 새어 나온다. 하필이면 올해엔 화요일이 추석이어서 연휴가 너무 길다나. 물론 옛날보다는 많이 간소해지고 단촐해졌지만 바뀐 생활패턴으로는 갈수록 버겁고 더 가위눌리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명절과 어머니를 함께 떠올린다. 전을 부치시며 따끈따끈한 전을 입에 넣어주시던 거며, 어머니 치맛자락에서 나던 들큰한 음식냄새며 아름다운 유년의 추억이다.
그러나 명절이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즐겁고 행복한 것이라면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함께 만들어내는 즐거움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걷어버려야 마땅하다. 여성은 명절 장보기부터 명절 다음날까지 어둠이 짙어서야 허리를 펼 수 있는, 일하는 기계에 지나지 않는데 다른 식구들은 앉아서 열심히 먹고 그윽거리거나 서로 한담을 나누며 어슬렁거리는 것이 고작이다. 돌아서면 또 이어지는 식사준비에, 손님접대까지 하다보면 돌아오는 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다음날의 정상적인 사회활동이 어려울 지경이다. 그럴 때마다 이런 중노동을 왜 여성만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인지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사람들은 민족고유의 아름다운 풍습을 왜 그리 부정적으로만 보느냐고 질책한다. 그러나 여성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것이 아름다운 명절이라면 나는 거부한다. 나에게도 즐거운 명절을 지낼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온고지신하라는 지혜를 배웠으니 이번 추석에는 한 가지만이라도 시도해보자. 가족이 모두 모여 명절 가사노동 표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한 톨의 쌀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농부의 여든 여덟번의 허리굽힘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명절을 지내기 위해 여성들이 어떤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표를 만들어 함께 이야기 해보는 거다. 담박에 무슨 효과를 기대하랴, 명절은 몇 달 후면 또 돌아오는 것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최근의 저출산, 여성의 출산파업을 예측하지 못했다. 모르는 일이다. 빨리 손쓰지 않으면 다음 세대의 여성들은 명절파업을 일으킬지도.
내가 즐거워야 명절이 좋다. 나도 명절이 즐거웠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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