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고학생부군, 이는 이 땅의 대다수 민중들에게 사후에 주어지는 자랑스런 칭호이다.

이들은 수많은 외침 속에서 이 땅을 지켜왔고, 찬란한 민족문화를 창조한 장본인이다.
고난의 근세에 들어오면서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고자 몸부림치던 이들도 그들이었고, 반만년간 내려온 가난의 굴레를 벗고자 허리띠를 조여맨 근대화의 역군도 그들이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쟁취한 힘의 원천도 그들이었고, IMF의 파고를 헤쳐나갈 주역도 그들이다.
그들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그 배를 엎어버릴 수도 있는 바다와도 같은 존재이다.


현고학생부군신위,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그래서 나와 내 자식에게만은 붙이고 싶지 않은 그런 칭호이다.
학생(學生)이라는 칭호는 이 땅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간 민초, 즉 별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는 자조적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학생이라는 칭호 대신 숭록대부니 자헌대부니 하는 거창한 명칭이 붙기를 고대하며 우리 선조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을 거부한 채 입신양명의 길로 치달았고 그것을 쟁취한 조상들은 두고두고 후손들의 자랑거리로 여겨졌다.

고작 쌀 10섬도 되지 않는 박봉에도 12대문에 99칸 저택과 수많은 노비를 거느리던 부정부패 정도는 아예 논의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그저 학생이란 딱지를 떼어낸 고마운 조상에 대한 연모와 감사와 경외의 정만이 가득할 뿐이다.

이런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학생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이라면 우리는 못 할 것이 없다.


우리는 양심의 가책 없이 부정을 저지를 수도 있고, 선배를 모함할 수도 있으며 변절을 밥먹듯이 할 수도 있고 이웃을 억누를 수도 있다.

게다가 못 이룬 우리의 한까지 담아 사랑스러운 우리의 아이들까지도 이 대열에 동참하기를 강요하고 있다.


‘닭대가리가 될지언정 소꼬리는 되지 말라’는 말이다. ‘아이들아, 야망을 품어라’라고 말하면 어딘지 그럴싸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오늘의 이 땅과 우리가 있게 한 것은 숭록대부나 자헌대부가 아니라, 우리들의 무시와 조소 속에 잊혀져 가고 있는 ‘현고학생부군(顯考學生府君)’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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