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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리고 기름배달

"엄마는 자식들이 넘어져 무릎이라도 까지면 당신 살이 패인 듯 안타까워했다" 박경호l승인2017.10.10l수정2017.10.10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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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내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아버지는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곳(청년 전태일이 1970년 11월 분신한 곳이다) 소규모 옷 공장에 미싱기름을 납품했다. 좋게 말해 납품이지 주문 전화가 오면 검은색 짐자전거에 기름통을 싣고 배달하는 영세 윤활유 장사였다. 그때 기름통은 군용 지프 뒤에 매달고 다니는 연료통을 사용했는데, 사람들은 '오가롱통'이라 불렀고 나중에 그것이 연료 5갤런을 담는 통인 걸 알았다.
 

 일본 공과대학에서 공부한 아버지는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더욱 편리하게 윤활유를 재봉틀에 사용할 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를 만들고 싶어했다. 설계도를 그리고 샘플 용기를 만들어 특허 절차를 밟기도 했는데, 지금처럼 플라스틱 용기가 없던 시절이라 아버지의 발명품(?)은 무척 조악한 형태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요즘 우리가 마시는 두유 용기 크기의 종이 갑 안에 윤활유가 담긴 비닐봉지를 넣고 그 종이 갑을 눌러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거였다. 노란 포장 용기 겉엔 아버지가 도안한 미싱 바퀴에 날개를 그린 상표 같은 것도 그려져 있었다. 그런 노력이 특허라든가 등록상표로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열심히 연구하고 애쓰던 아버지의 모습은 내 어린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늘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친절하고 성실한 아버지 덕분에 기름배달 장사는 단골들이 많이 생겼다. 나중엔(1973년) 대학생 형과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내가 일주일씩 교대로 2년 동안 아버지를 도와 기름배달을 했다.
 

 점포라고 할 것도 없는 사무실 겸 기름 창고는 황학동 중앙시장 근처에 있었다. 장사를 마친 노점 상인들의 리어카를 맡아주는 보관소 한쪽을 빌려 사용하는, 정말 코딱지만 한 공간이었다. 기름에 쩌든 작업복을 입고 일하는 자식들을 엄마는 안쓰러워했다. 좁고 기름 냄새나는 창고에 나와 주문 전화를 받으며 배달하고 돌아온 아들 입에 떡 한 조각이라도 넣어주려 애썼고, 배달하다 넘어져 무릎이라도 까지면 당신 살이 패인 듯 안타까워했다.
 

 주문은 주로 오가롱 한 통씩이었는데, 배달할 곳이 겹칠 때는 자전거에 오가롱통 세 통을 싣고 다닐 때도 있었고 먼 곳은 홍제동이나 세검정까지 배달했다. 가파른 세검정 고개를 쉬지 않고 자전거로 올랐던 걸 보면 그땐 내 다리가 꽤 튼튼했던가 보다.
 

 양손에 기름통을 들고 계단을 오를 때면 무척 무거웠고 주문한 공장 사람들은 친절하지 않았다. 기름통에 윤활유를 넣어주다 바닥에 흘리기라도 하면 짜증스레 자투리 옷감을 던져주면서 닦으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런 경험으로 나는 요즘에도 액체를 옮겨 담을 때 나름의 요령이 있어 바닥에 흘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
 

 힘든 일이었지만 배달하고 시장 밖으로 나와 당시 서울음대 담벼락 아래 노점에서 군것질하는 쏠쏠한 재미도 있었다. 한 번은 아는 여학생과 마주치기도 했다. 배달 마치고 동대문야구장 근처를 자전거 타고 지나는데 친하게 지내던 연합동아리 여학생이 앞에서 걸어오는 게 아닌가? 다를 때 같으면 먼저 달려가 말을 걸었겠지만, 짐짓 모른 척 지나쳤다. 굳이 부끄러울 건 없었지만 내 차림이 너무 지저분했기에 혹여 그 여학생이 놀라거나 도리어 민망해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외대 태국어과 곽영란 씨! 그때 내가 옆을 스쳐 갔다는 거, 지금까지도 모를 거다!

 박경호
 1956년생/서울 마포구 아현동 출생/40년 가까이 방송인 외길 인생/2011년부터 강원교통방송 DJ/경쟁이 싫고 돈이 하찮은 정의의(?) 사나이/아내와 노는 게 여전히 가장 즐거운 사람


박경호  wonjutoda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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