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방학이 끝나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손주 녀석이 여름방학 때 한국사능력시험을 보겠다고 했습니다. 순간, 하도 기특하여 엉겁결에 '나도 같이 보자'고 하며 시험점수가 할아버지보다 '일 점'이라도 더 많으면 원하는 것을 상품으로 사주겠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녀석은 반색을 하며 동점이면 어쩌실 거냐고 묻기에, 동점도 1점 이상으로 인정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곧 후회를 했습니다. 녀석은 한국사가 필수과목임을 강조하는 주변의 분위기에 끌려 이미 5학년 초부터 주말이면 교육문화관에서 수강하고, 학교에서는 방과 후 수업으로 한국사를 공부해왔습니다. 녀석과의 승부에서 내가 1점이라도 뒤지게 되는 경우는, 보통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권위는 '만점' 정도가 되어야 보장이 될 텐데…. 거듭 고민해보았으나 어차피 시험점수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3월부터 한국사능력 학부모반에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남자수강생도 세 명이 있었으나 내가 제일 고령이었습니다.
봄 학기 4개월은 너무 짧았습니다. 드디어 여름방학 중인 8월 제36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응시했습니다. 조손간에 같은 과목 같은 등급 시험을 같은 고사장에서 같이 치렀습니다. 정답을 공개하기 전에, 고사장에서 가져온 시험문제지에 미리 채점을 해보았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두 문제가 틀렸습니다. 도저히 틀릴 수가 없는 문제였는데, 무뎌진 순간 판단력을 원망했습니다.
 

 그날 고사장의 분위기는 성별도 연령 구분도 없고, 전산화된 답안지 작성요령 등, 모든 것이 생소했습니다. 시험이 시작되자 공연히 긴장이 되었고, 손이 떨려 수험번호표시를 잘못하여 감독관이 급히 답안지를 바꿔주는 촌극도 있었습니다. 참으로 민망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는 네 문제가 틀린 것 같다며 할아버지는 100점이냐고 물었습니다. 녀석에게 '백 점'을 채근해오긴 했으나 할애비의 점수가 궁금한 것은, 동점이라도 되기를 기대하는 간절함 때문일 것입니다. '두 문제 틀렸다'고 했습니다. 녀석은 오후 3시에 정답발표를 한다면서 얼른 전화를 끊었습니다. 두 문제 틀렸다는 할애비의 짧은 대답에서 몹시 씁쓸해하는 표정을 읽은 모양이었습니다. 발표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후에, 녀석은 평소와는 달리 전화를 하지 않고 카톡을 보내왔습니다.
 

 "저는 89점입니다. 1점만 더 맞으면 90점인데 아깝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채점이 끝난 자신의 문제지도 사진으로 보냈습니다. 녀석의 문제지에는 내가 틀린 두 문제가 정답이었습니다. 내 문제지도 정답과 대조해보니, 또 한 문제가 오답이었습니다. 물론 녀석은 아직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한여름도 외면하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는데, 녀석과 겨우 한 문제 차이라니, 헛수고를 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되어 녀석의 점수가 나보다 1점이라도 더 높았으면, 녀석의 자만심을 부추길 뻔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어제는 녀석과 함께 서점에 들러 올겨울방학 때, 중급시험 3급에 도전하는 서로의 각오를 다짐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성적에 대한 상품수여기준은 '90점 이상'으로 결정했습니다. 이제는 서로의 점수를 비교할 필요가 없지만, 감히 할애비를 타깃으로 동점 운운하는 녀석에게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국사능력 3급이 교사임용시험 응시요건이고 보면, 결코 녹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뚜렷한 목표의식이 기대하는 효과로 이어지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녀석과 같이 다시 한 번 만점에 도전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결과가 어떠하든 최선을 다한 서로의 모습에서 나름의 보람을 찾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번의 시험 성적은 '단 한 문제 차이였다'는 사실을 녀석에게 고백하겠습니다. 이 사실이 녀석을 자극하여 다음번에는 진검승부가 될 것 같습니다.
 

최준(공무원문인협회 회원)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