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시노인종합복지관(이하 복지관) 행사 때 마다 낭랑한 목소리로 사회를 진행하는 어르신 한 분이 눈길을 끈다.

또랑또랑한 말투에 노인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위트있는 멘트까지 더해져 젊은 사회자를 세웠을 때 보다 노인들의 반응이 뜨겁다.

능숙한 진행이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은 김주혜(74, 행구동) 어르신은 34년간 KBS방송국 아나운서로 일한 전문가다.

김 어르신은 행사 사회를 맡은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얼굴에 곱게 화장을 하고 깔끔한 차림을 한다. 그리고 항상 밝은 얼굴에 당장 무엇이라도 척척 해 낼 것 같은 당당한 표정이다. 복지관 늘푸른 학생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 어르신은 복지관에서 재주꾼으로 통한다. 남다른 재능을 가진 것과 더불어 어떤 일이든 앞장서 봉사하기 때문이다.

김 어르신은 'KBS방송국 정년퇴임 1호 여자 아나운서'로 기록된 사연을 말하며 현직에 있던 시절을 이야기했다. "과거에는 여자들이 시집을 가면 청첩장과 사표를 함께 냈다"면서 "그때는 일하는 여자가 드물어서 취직하기가 참 힘들었는데도 결혼을 하면 그만두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1963년 4월 여자동기 6명과 남자 동기 6명이 함께 입사했지만 정년퇴임한 여자 아나운서는 김 어르신 한 명 뿐이었다.

"혼기를 놓쳤던 것이지 뭐"라며 호탕하게 웃는 김 어르신은 사실 그만큼 일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이 대단했다. 김 어르신이 입사했던 당시는 TV 보급률이 낮고 라디오가 매체의 기능을 했던 시절이다.

월남전 참전 병사들을 위해 월남으로 전파를 송신했던 '파도를 넘어서'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는 팬레터가 다락을 가득 채울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 '희망의 등대', 매주 토요일 전국의 청취자를 라디오 앞으로 불러 모으던 '가요톱텐' 등 수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지금도 김 어르신에게 모두 잊지 못할 행복한 시간이었으며, 또 아나운서로 일한 재능으로 지금도 봉사할 수 있는 게 감사할 뿐이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 KBS방송국 서울 본사에 근무했던 김 어르신은 지역 방송국으로 순환근무를 했던 시기에 원주와 첫 인연을 만들게 됐다. 딱 1년 근무한 곳이지만 원주에 정을 갖게 돼 나이가 들면서 원주에서 노후를 보내리라 마음 먹었다. 그렇게 준비해 퇴직하고 원주에 내려와 산지 벌써 11년이 됐다.

김 어르신은 "그나마 지인이 몇 명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원주는 참으로 정감 있고 따뜻한 제2의 고향이다"라며 "내가 발을 디딘 이상 내 고향으로 삼아 애정을 갖고 지금처럼 즐겁게 살며 마지막까지 원주에 남을 것"이라고 애향심을 표했다.

여행을 좋아해 미국만 해도 11번을 다녀온 김 어르신은 버스(bus, bicycle)와 지하철(metro), 도보(walking)로 다니는 'BMW족'이다. 실제로 원주에 내려와 구석구석을 알고 싶어 시내버스에 올랐다.

2번부터 91번까지 출발지에서 버스를 타 종점까지 왕복했다. 한 노선도 빼놓지 않아 동지역은 물론이고 면지역 각 리와 동네이름까지 버스 노선과 함께 꿰고 있다. 그만하니 버스기사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나 땅을 보러 다니는지 묻기도 했고, 사람들은 김 어르신을 원주 토박이로 보기도 한다.

독서를 취미로 가져 과거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을 찾아 섭렵하고, 한문 서예 실력도 뛰어나 지난해에는 한국서화협회가 주최한 대회에서 삼체상(三體賞)을 받기도 했다. 그 밖에도 하모니카, 역사교실 강의, 탁구 동아리 등 다양한 것을 배우고 즐기는 김 어르신의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김 어르신은 "원주, 그리고 복지관에서 보내는 노년의 생활이 정말 즐겁고 좋다"며  "앞으로도 복지관에서 힘을 다해 봉사하고 싶고, 복지관이 하루 빨리 더 넓은 공간을 확보해 노인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복지관 활성화는 행정적 지원 이전에 노인들 스스로의 노력에 달린 것"이라며 "노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율적으로 활기찬 복지관을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미희 기자  mhhan@wonju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