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화칠기는 나전을 쓰지 않고 칠에 안료를 섞어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낙랑칠기로도 불린다. 신라 천마총과 백제 무령왕릉 등에서 출토된 유물에서 같은 기법을 확인할 수 있을뿐 고려 이후 유물에서는 흔적을 찾을 수 없어 단절된 기법으로 여겨졌다.

칠화칠기가 복원된 것은 고 일사 김봉룡(1902~1994·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선생을 통해서다. 선생이 작고한 이후에는 제자인 소하 양유전(65) 장인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스승으로부터 '칠기의 원형으로 꼽히는 중국 한나라의 낙랑칠기(칠화칠기)를 우리 것으로 만들라'는 필생의 과제를 받고 1970년대부터 이 과제를 작업의 중심으로 삼아 40여년간 칠화칠기를 되살리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통영에서 태어난 장인이 칠과 인연을 맺은 것은 중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다. 이종사촌 형님의 권유로 작은 공방에 들어가 나전칠기를 배운 것이 칠과 인연의 시작이다. 대부분 캐슈로 칠을 할 때였다.

주위 선배들을 통해 옻칠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당시 100% 옻칠을 사용하는 작업은 고 김봉룡 선생이 유일했다. 원주에 있다는 선생께 무작정 편지를 썼다.

선생이 몸 담았던 태장동 칠공예주식회사에 화재가 나면서 인연은 뒤로 미뤄졌지만 옻칠을 배워야겠다는 의지는 쉽게 굽혀지지 않았다. 군 제대 후 다시 원주로 선생을 찾아갔다. 그리곤 칠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그 때만해도 이 길이 40년 넘게 이어질 것이라곤 상상조차 못했다.

고된 일이긴 했지만 낮에 작업을 끝내고 밤이면 할 일이 없었다. 온 몸에 옻이 올라 밖에도 나가질 못할 때였다. 무료함을 때우려 스승의 만류에도 밤마다 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심히 지켜보던 스승은 어느날 불쑥 작은 쟁반을 내밀었다. 평안북도 태천양성소에서 제작한 낙랑칠기 쟁반이었다.

"그 때 선생님이 보여준 쟁반 하나에 감동해 빠져들었다"는 그는 그 후 하루 8시간 이상 칠과 씨름하며 스승이 내준 숙제인 칠화칠기 재현에 매달렸다. 양 손은 나무와 사포에 치여 온통 상채기 투성이가 됐지만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렇게 3년만에 1977년 '칠화벽화문쟁반'으로 인간문화재 공예작품전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칠화칠기로는 국내에서 처음 출품된 작품이었다.

이후 전승공예대전 장려상,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강원미술대전 특선 등 각종 공예대전에 이름을 올리다 2005년에는 일본 이시가와 국제칠전에서 은상을 수상했다. 20여년 전부터는 강원도무형문화재 지정요청이 있었지만 후배들을 추천하며 한사코 거절했다.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그가 4수를 하면서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일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이다. 명예나 돈을 벌겠다는 욕심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도 칠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은 간혹 있지만 마음과는 달리 거절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도제수업을 해야만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데 적어도 먹이고 재우는 문제가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 장학금을 주면서 2명까지 가르칠 수 있어 후학을 키워낼 수 있다.

"젊은 친구들에게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전통에 정통을 가르치고 싶다"는 그는 "눈이 가는 기재는 있지만 내 스승처럼 작업에만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자신이 없어 손을 내밀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가 또 하나 공을 들이는 일은 칠의 대중화다. 9년째 매일 작업일지를 기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전문가를 위한 이론서는 많이 있지만 일반인을 위한 책은 없어 결심한 일이다.

중학생이 보고도 쉽게 이해하고 따라하면서 작품까지 만들 수 있는 책을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다. 5년 정도 더 준비해 칠순 때는 출판기념회를 갖겠다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

지난달 15일부터 24일까지 원주문화재단 창작스튜디오에서는 뜻깊은 전시회가 열렸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 21주기를 맞춰 준비한 양유전 장인의 칠화칠기전이 그 것이다. 전시장 곳곳에서는 관람객들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40여년 외길을 걸어 온 장인의 작품은 보는 이의 시선을 붙잡았다. 혼을 담은 선 하나하나에서 시간의 겹이, 올곶은 한 길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낳아준 부친 외에도 두 분의 아버지가 더 있다고 했다.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능력을 키워 준 일사 선생과 자신의 마음을 들어준 고 무위당 선생이 그가 아버지로 여기는 분들이다.

두 스승을 "하늘같은 분들"이라고 언급한 그는 "많은 은혜를 입었는데 한번도 그 은혜를 갚은 적이 없다"면서 "이번 전시회를 위해 작품을 선별하면서 과거 선생님들이 일러주신 말씀들이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고 했다.

"스승이 던져준 쇠절구로 바늘은 만들었지만 바늘귀는 아직 만들지 못했어요. 바늘귀는 혼자 만들 수 없어요. 제대로 된 후학을 키워냈을 때 비로소 바늘귀를 완성해 제대로 써먹을 수 있을 겁니다." 40여년 외길을 걸어 온 장인의 말 속에 진심이 묻어난다.

김민호 기자  mhkim@wonju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