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족의 장녀, 또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다가 환갑을 넘긴 늦은 나이에 그림에 빠져들었고 지금은 어엿한 작가로 활동하는 할머니.

그 주인공은 개운동에 사는 정옥환(79) 씨다. 주말에 야외 사생으로 화폭을 담는 모임인 원주일요화가회 고문과 한국가톨릭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남들보다 조금은 느리지만 꾸준히 그려온 수채화·유화 작품이 100점을 훌쩍 넘겼다.

일요화가회 정기전에 꾸준히 참여하는 한편 원주시민작가초대전, 원주교구 가톨릭미술가전, 수채화 동호회 '그리나니' 전시회 등 다수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미술에 대한 갈망, 공부에 대한 꿈은 어린 시절부터 환갑을 넘은 당시까지도 가슴 속에 내재돼 있었다. 횡성군 공근면에서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난 정 씨는 공부를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면장으로 재직하는 등 부족함 없는 집에서 자랐으나 남성에 치우친 당시 사회분위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했다. 동생 5명은 모두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설움이 컸다. 결혼을 한 뒤에도 지금은 고인이 된 부군 최영침 씨와 두 아들을 챙기느라 공부는 꿈도 못 꿨다. 또 맞벌이 하는 아들 내외를 위해 손자둘을 살뜰히 보살폈다.

그러던 1999년 어느 날, 정 씨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당시 손자들과 함께 살았는데 미술을 가르치는 개인교사가 찾아오게 된 게 계기가 됐다. 호기심에 손자들이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던 정 씨는 어느 순간부터 미술에 매료되기 시작해 가족들의 동의하에 같이 수업을 받게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2000년에는 손자, 며느리와 함께 작게나마 가족 전시회를 열어 훈훈한 감동을 전했다.

이후 정 씨는 또 다른 미술세계를 접하게 됐다. 원주여고에 재직하며 학교에서 어머니교실을 지도한 심종식 현 일요화가회 회장을 만나 가르침을 받게 된 것. 비슷한 환경의 주부들과 같이 그림을 그리니 마음이 한결 편했고, 작품활동도 수월해졌다.

2004년부터는 심종식 회장과 함께 일요화가회 구성원이 되면서 폭넓은 활동을 펼치게 됐다. 주말이면 야외로 나가 자연을 벗 삼아 그림을 그렸고, 반곡동 일요화가회 작업실에도 꾸준히 나가면서 30여명의 동료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자신의 역량을 끌어올렸다.

심종식 회장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술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지니셨고, 젊은 회원들과도 융화되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다"며 "집에서는 평범한 어머니일지 몰라도 붓만 들면 훌륭한 작가로 거듭난다"고 말했다.

정 씨는 가족의 이해와 도움 없이는 미술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생 모임이 있을 때면 장소가 어디든 아들과 며느리가 태워다 줬고, 일가친척들도 오랜 기간 가족을 위해 희생한 정 씨의 꿈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있다.

문막 반계초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인 큰며느리 정미경 씨는 "팔순을 앞둔 나이시지만 열정을 다해 그림을 그리는 어머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며 "더 젊으셨을 때 꿈을 이뤄드리지 못한 게 못내 아쉽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그날까지 작품활동을 하시도록 곁에서 도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경로당에 가는 것 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다"는 정 씨는 "지금 이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면서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가족들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박동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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