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올 듯 흐리고 날씨가 선선해 얼른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박경리 선생님의 장례를 보고 싶어 통영을 다녀오느라 수면부족 상태였지만 걷기에 좋은 날이다. 
　봉산동 현대아파트 건너편에 '개륜마을'이라고 쓴 비석을 지나 철로 밑 굴다리를 지난다. 왼쪽으로 공동묘지가 있고, 마을을 통과해 '천사의 집'까지 올라간다. 올라가다가 오른쪽으로 푹 꺾인 길로 들어가야 번재로 넘어가는 길이다.
　5월은 농사철이라 논과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많았다. 모내기를 위해 논에 물을 채우고 있는 김재덕 씨(58)를 만났다. 이 마을에서 25년 동안 살고 있다는 그는 꽃이 많아 꽃동네로 불리기도 한다며 마을자랑을 늘어놓는다.
　10년째 이 동네 길을 걷고 있다는 52세의 아주머니 왈 "고개마다 팻말을 하나씩 만들어 두면 길을 잃지 않고 다닐 수 있는데, 처음 오는 사람들은 이정표가 없어서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헷갈리기 십상이다"고 하신다. 동감이다. 나 역시 이 코스를 걸으면서 유난히 갈림길이 많아 여러 차례 되돌아 와야 했다. 처음 이 코스를 도전해 보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주민들에게 물어보고 가는 것이 좋겠다.
　길을 잘못 들어 화시래 쪽으로 넘어가는 길 초입에 파란색 집이 있는데 이곳에서 보는 원주시가지는 참으로 아름답다. 그 길로 쭉 걸어가다 보면 아득히 철로가 보이고, 철로를 가로질러 큰 길로 내려가면 왼쪽으로는 번재, 오른쪽으로는 행구3교로 통하는 길이다. 천사의 집을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다보면 언덕 꼭대기에 화장실이 하나 있다. 전 구간에 걸쳐 간이화장실은 이곳이 유일하다. 나무 층계를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도 운치 있다.
　산을 깊숙이 파서 내 놓은 산길을 걸어 나오니 마을이 있다. 번재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육판정'이라고 쓴 정자가 보이는데 이곳에서 아래쪽으로 가지 말고, 위쪽으로 올라가야 한다. 대각사가 길 왼편 언덕 너머에 있다. 육판정에서 잠깐 쉬었다가 가자. 물레방아가 있어 시원하고, 방아다리가 옛것 그대로 남아있어 눈이 즐겁다.
　언덕에 올라 저 아래로 보이는 마을이 번재다. '봉산동 교도소 이전 반대'라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가야한다. 오른쪽으로 가면 살대울과 화시래로 가는 길이다. 5분쯤 걷다보면 왼쪽으로 저수지가 보인다. 일가족이 낚시를 즐기고 있다. 위쪽 논에서는 허리 굽은 노인 내외와 젊은 아들이 모판을 경운기로 옮기고 있다. 묘한 어울림이다.
　조금 더 걸어가면 '해바라기 농장'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잘 가꾸어 놓은 꽃들 속에서 싫지 않을 정도의 가축 냄새가 났다. 코를 킁킁거리며 걷는데, 밭에서 할머니가 무언가를 뜯고 계셨다. 여쭤보니 밤나물이란다. 취나물과 같은 맛이 난다며 뜯어 놓은 나물을 전부 주신다. 사양했지만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을 거절할 수가 없다. 힘이 들어 아무데나 주저앉고 싶었는데 할머니 웃음과 따뜻한 마음으로 발이 훌쩍 가벼워졌다.
　뛰듯이 길을 재촉했다. 능골이다. 길에서 만난 동네 아저씨는 세종대왕 능을 만들려다 터가 좁아서 만들지 못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언덕을 넘으면 똑바로 가는 길과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인 길이 나온다. 똑바로 가면 황골로 가는 길이므로 오른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 받아 놓은 논물에 백로가 앉아 나그네를 구경한다. 새소리와 바람소리, 김삿갓이 걸었던 길이 이랬을까?
　모래기철교 앞에서 왼쪽 못골로 가는 길은 마을을 지나면 끊기고 만다. 원흥건철(주)과 국제건축을 지나 살대울교를 막 지나면 효성 백년가약 아파트를 짓느라 주변이 어수선하다. 시루봉가든을 지나 행구3교부터는 차가 많은 대로다. 시골의 아늑함이 끝나고 시끌벅적한 도시소음이 몰려온다.

걷기 도우미

　코스가 길지만 어려운 길은 한군데도 없다. 다만 시멘트 길이라 운동화는 걷기 전용으로 신어야 덜 힘들다.
　현대아파트 쪽에서 출발, 화시래로 곧장 넘어와 행구 3교를 걷는 길은 30분,  번재 삼거리에서 화시래 쪽으로 넘어오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화시래에서 번재를 지나 모래기철교 쪽으로 넘어오면 한 시간 정도 걸린다.
　화시래는 태종이 운곡선생을 찾아왔다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새를 쏘아 땅에 떨어뜨린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버스노선: 현대아파트 5, 81, 82, 83번. 화시래 82, 83번. 번재 83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