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경 호 (21세기 농촌선교회장)

인간의 역사에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새롭게 특징 지워지는 것들이 있다. ‘시대정신’ 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변화의 밑바닥에서 그 시대를 관통하여 맥맥히 흐르는, 한 사회가 지향하는 대표적, 중심적인 정신 혹은 보편적 가치관을 시대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우리는 이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876년 일제와의 불평등 조약인 병자수호조약 체결이후 본격화된 외세의 침탈 하에서 우리 조상들은 동학군으로, 의병으로, 독립군으로 외세와 맞서 싸웠다. 이 외세와의 대립과 투쟁 속에서 ‘민족의식’이 형성되었고 이것은 3ㆍ1만세운동을 통하여 전(全)민족의 마음에 내재화되었다.


8ㆍ15해방 후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였으나 국민주권은 뺏긴 채 독재치하에 억눌렸고 이 반(反)독재 투쟁 속에서 ‘민주의식’이 형성되어 갔다. 4ㆍ19혁명은 이 ‘민주의식’의 민족적 표현이었다. 이후 군사독재하에서도 민주화 투쟁은 지속되었으며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을 통하여 ‘민주의식’은 흔들릴 수 없는 민족적 지향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이 민주의식의 형성과 병행하여 형성된 또 하나의 시대정신이 있으니 그것은 ‘민중의식’이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 정책이후 이 땅에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등 노동계층이 다수 형성되었고 예전과 달리 자신들이 역사변화와 발전의 주체라는 자의식(自意識)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다. 1980년의 5ㆍ18 광주항쟁을 통하여 이 민중의식은 시대정신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동시에 산업화와 도시화로 환경이 파괴되고 생태계가 죽어가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1980년대 이후에는 ‘생명의식’이 이 시대의 중심적인 정신과 가치관으로 등장하고 있다.


지난 5월 11일 서울시 교원연수원에서는 ‘고(故)서 교장 추모대회 겸 전국학교장 결의대회’가 열렸다. 이상진 회장의 대회사에 이어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연사로 나섰다. 그는 “전교조가 반미친북을 외친다면 북의 지령을 받는 것 아닌가” “나라를 망친 햇볕정책을 계승한 노무현씨를 나는 대통령으로 불러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기염을 토했다고 한다.


씁쓸한 일이다. 1970년대까지 민주화 투쟁의 대열에서 함석헌선생등과 함께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애썼고 그 때문에 옥고까지 치른 그가 아닌가! 그런 그가 21세기의 벽두에 교장 선생님들 앞에서 그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외친 말이 고작 그 수준이라니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그는 1980년의 광주항쟁을 소화하지 못한 것 같다. ‘민족’과 ‘민주’의 실체인 ‘민중’이 거대한 힘으로 등장하는 것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민중’을 받아들이기에는 이미 가진 것이 많은 기득권자였기 때문일까?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재벌총수인 정주영씨와 손잡고 정치활동을 하더니 해프닝으로 끝나고 결국 정치권을 떠났다.


그의 시대정신은 중산층 중심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외쳤던 1970년대에 머물러 있다. 그의 자유민주주의는 역사이래 가장 역동적이고 투명하게 이루어진 선거에서 당당하게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람을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않는 자의적(恣意的)민주주의이며 아직도 반공, 반북의 분단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냉전적(冷戰的) 민주주의이다.


시대정신을 소화하지 못하고 시대와 불화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한때 존경의 마음을 가졌던 사람으로써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대와의 불화는 ‘정의와 공평’ 을 소리높이 외침으로써 구속되고, 감옥에 갇히고, 나라밖으로 추방당한 성서의 예언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 김동길의 경우는 시대의 지진아가 갖는 불화요 예언자들의 경우는 시대의 선도자가 겪은 불화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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