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세 현 (상지영서대 문예창작과 교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는 최근 출판된 황동규 시인의 시집 제목이다. 회갑을 넘긴 시인의 문학을 향한 열정이 뜨겁게 성취된 시집이다. 시집을 펼치고 있으면, 그 안에 담긴 한 시적 인간의 뜨겁고 황홀한 영혼의 모습이 넘치도록 그윽하게 안겨 온다.



시에 대한 안쓰러움이 있는 사람이거나 시의 내밀함과 접속된 경험이 있는 독자들은 쉽사리 이 시집의 감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아마 그게 황동규 시의 매력이거나 아니면 더 범박하게는 시라는 문학제도의 시들지 않는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대학에 글쓰기 학과인 문예창작과가 개설되었을 때 학과의 존립을 걱정하는 소리가 많았다. 요즘같은 시대에 학생들이 문창과 같은 난삽한 학과를 지망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라는 게 걱정의 근간이다. ‘요즘 같은 시대’는 ‘골똘한 생각’을 거부하는 시대를 의미할 것이고, 문창과와 같은 전통적이고 고리타분해 보이는 창작 분야는 학생들이 외면한다는 것이다.



강원도 최초와 하나뿐이라는 유일성에 기대하면서 학과를 개설하게 되었는데 결과는 애시당초의 판단과는 거리가 있는 정원미달증세에 시달리고 있다.

김유정, 이효석, 박인환, 이태준과 같은 걸출한 시인과 소설가를 배출한 고장이 강원도이다. 지금 문단에서 활발하게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강원도 출신의 작가들도 다수에 이르고 있다. 문제는 이들 작가들의 뒤를 이을 창작인력을 키워낼 고급한 창작스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예창작과는 이러한 문화적 배경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학과이다.



장편소설 ‘네이티브 스피커’를 쓴 재미교포 작가 이창래는 단 두 편의 소설을 쓴 작가적 재능이 인정되어 프린스턴 대학의 정교수로 불려갔다. 물론 우리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와 경영의 중심인 미국 주류사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은 참고할 만하다.



시창작실기 시간에 학생이 제출한 시가 생각난다. 시의 구체는 기억되지 않지만 시가 간직한 함의는 재생된다. 부동산중개사 공부를 하는 친구와 보들레르 시집을 읽고 있는 시적 화자를 비교하면서 현실에 대응하는 두 양태를 보여준 시였다. 착상 자체는 놀랍거나 새로울 것이 없다. 이러한 관심은 현진건의 단편 ‘빈처’에서 극명하게 대비되어 문학사에 제출된 바 있다. 요컨대, 물질 자체를 지향하는 세태 안에서 정신 자체를 지향하려는 시를 공부하고 있는 자신의 다소 한심스럽고 어지러운 심뇌를 시 속에 요령있게 포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예창작을 전공하려는 사람들의 고민과 수심을 짚어낸 습작이라는 점에 수긍하면서도 나는 이 시의 어떤 점을 칭찬하고 조언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던 기억이 있다. 언제나 그렇지만 시는 기교의 차원이 아니라 시선의 차원이다. 요즘처럼 생의 비의를 건너다보는 시선보다는 로또에 목숨 거는 국가 속에서 한 편의 시를 흔든다는 것은 극히 위태로운 시대착오가 아니겠는가, 여긴다.



밥상을 차리는 사람은 누군가의 허기를 생각한다. 이 밤도 우두커니, 목련이 지는 소리에 넋을 놓고 자신의 생을 가늠하고 있을 시인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삶이 지속되듯이, 시정신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과대한 예술적 강박에 시달리면서, 그나마 존속되는 원주의 시창작스쿨이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찬 소주 한 잔을 바라보듯이, 일찍 요절해버린 시인들의 망령들과 함께, 얇은 시집 한 권에 기대듯이, 나도 우연에 기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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