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 영 춘 (원주여자고등학교 교장)
■강원도 평창군 봉평 출생
■원주여고 졸업
■경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6년 제19회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으로 등단
■춘천 시민상(1999)문화
예술부문수상
■제10회 경희 문학상(1993)수상
■시집 《종점에서》, 《시지포스의 돌》,
《귀 하나만 열어놓고》,
■수필집 《그래도 사랑이여》 상재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이다.
우리 반에는 아주 힘이 센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힘이란 것이 보통 우리가 말하는 기운(力)이 아니라 기(氣)가 강한 깡이었다. 그 아이에게 그런 힘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는 지금도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아이의 어머니가 우리 고장에서 소위 말하는 유지란 유지분들은 모조리 뒤흔들고 있다는 어렴풋한 소문 아닌 소문을 들었을 뿐이다.


아무튼 우리는 그 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혹은 같이 노는데 끼이기 위해서 매일 아침 무엇인가를 갖다 바쳐야만 했다. 요즘 말로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집에서 부모 몰래 훔쳐다 준 것은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엿이라든가 강정 같은 것들이었다. 하루는 광밥(옥수수 튀긴 것)을 몰래 손수건 같은 것에 싸다가 주었더니 이딴 걸 주느냐?면서 홱 집어 내던지는 게 아닌가! 얼마나 창피하고 주눅이 들었던지 기도 못 펴고 발발 떨었던 기억이 난다.
어디 그 뿐인가! 우리 반에서 소위 공부를 제일 잘 하는 H라는 아이는 꼬병 중에서도 왕 꼬병이었다.


이웃집에 사는 그 H는 아침저녁으로 그 아이의 책 가방을 날라다 주어야만 했고 심지어는 먹는 물까지 떠다 바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꼬병 아이는 집안으로 보나 공부로 보나 힘이 센 그 아이에게 꿀릴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그토록 꼼짝을 못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청명한 어느 가을날 아침 조회를 서기 위해 우리는 운동장에 모두 모여 줄을 서야했다. 그런데 그 힘센 아이는 옥수수를 먹다가 자기의 오른팔이라고 하는 공부 잘 하는 꼬병에게 그 옥수수를 들고 있으라고 하는 게 아닌가! H는 옥수수를 자기 치마 속에 감춘 채 한 팔로 선생님의 구령에 따라 “앞으로 나란히”를 하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 뒤에 섰기 때문에 그 광경을 다 지켜 볼 수 있었다. 그 때 난 얼마나 조마조마 했던지 지금도 그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얼마나 무섭게 시달렸던지 성인이 다된 후에도 가끔 그 아이가 꿈에 나타나곤 했다. 옥수수를 들고 있던 H와도 우연한 기회에 만났는데 그 애 역시 나와 같은 꿈을 꾼다고 했다. 때로는 그 아이를 위해서 기도까지 한다고 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용서가 안 된다고도 했다.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 김동성 선수가 금메달을 빼앗긴 것은 우리 나라가 힘이 없기 때문이다. 모국이라고 하는 그 어머니의 기가 약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다.
힘있는 집안의 아이들은 밖에 나가서도 항상 기를 펴고 산다. 그러나 힘없는 집안의 아이들은 손에 쥐고 있던 과자를 빼앗기고도 그 정당성마저 하소연 할 곳조차 없다. 김동성의 경우가 바로 그런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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