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 감 상
김 성 수(한국문인협회 원주지부장)

김현승 시인의 시를 읽으면 절로 옷깃이 여며진다. 그 만큼 그의 시는 경건하고 차분한 투시력을 가지고 있다. 김현승 시인만큼 언어의 순화와 모국어의 사랑을 위해 노력한 시인도 그리 많지 않다. 황금찬 시인의 말을 빌리면 그 분만큼 가을과 커피를 좋아한 시인도 없었다고 한다. 茶兄이라는 그의 호는 커피를 좋아하기 때문에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이 시에서의 가을은 내면의 충실을 기하는 시에 좀 더 깊은 생의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 이 시를 썼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김 시인이 그렇게 좋아하던 계절, 가을도 이제는 가 버렸다. 그러나 가을은 내년에는 다시 오지만 불귀의 길을 떠나신 분은 다시 올 수가 없다. 황금찬 시인은 김 시인을 추모하여 아주 짤막한 시 한 구절을 썼다고 한다.
茶兄
사람은 가을이 아니어서
한 번 가고는 못 오는가 보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