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8년 식년문과에서 2등으로 합격한 한산이씨 문중 이노규의 과거시험 답안지(사진: 원주역사박물관).

과거 원주 사람은 '사치를 멀리하고 근면 검소하였다. 사냥하고 물고기 잡는 청년은 사윗감으로 삼지 않았다'라는 당시 세간의 평가와 함께 원주 사람은 공부에도 게으르지 않았다. 낮에는 밭에 나가 힘써 일했고 밤에는 공부에 열중하였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원주는 나라 안에서 알아주는 공부하기 좋은 도시였다. 요즘 말로 바꾸면 학세권인 셈이다. 

학세권은 학교와 가까워 아이들이 공부하기 좋은 지역을 표현하는 부동산 업계의 신조어이다. 학교뿐 아니라 이름난 입시학원이 많은 서울 강남 같은 지역이 알려진 학세권인데 부동산 거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요즘 좋은 대학 진학을 위하여 진학률이 높은 학교와 학원이 있는 지역으로 이사하는 것처럼 조선시대 때에는 출세의 수단이었던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하여 자제들이 공부하기 좋은 환경을 가진 도시로 이사하는 것을 선호했다. 조선시대뿐 아니라 성현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 공부를 위하여 세 번 이사했다는 고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세권을 선호하는 것은 동양의 오랜 전통이다. 

과거시험 응시의 전제가 되는 소과 합격률을 기준으로 보면 원주는 조선시대 전국에서 네 번째 학세권이었다. 산업화 이전 전근대기의 조선시대 때 유일한 출세의 수단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는 일이었다. 가난한 사람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면 명예와 부를 얻을 수 있었으니 누구나 할 것 없이 과거시험에 전념하였다. 조선 고종 때 박문규라는 사람은 83세 때 대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는데, 조선시대 남자들에게 과거시험 합격은 평생의 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일은 개인의 출세뿐만 아니라 가문의 영광이었다. 양반이라는 명예로운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과거시험 합격은 필수였다. 

조선시대 600년 동안 과거시험 소과 합격자를 배출한 도시는 서울 14,338명, 안동 783명,  충주 624명, 원주 570명 순이다. 원주는 전국에서 네 번째로 많았다. 원주 다음으로는 개성 569명, 평양, 529명, 공주 512명 상주 470명, 전주 432명, 청주 430명, 남원 389명, 해주 369명, 양주 349명, 경기도 광주 344명, 선산 329명, 나주 323명, 함흥 308명이다. 원주보다 규모가 큰 전주와 평양, 개성 같은 도시와 현재 교육도시로 알려진 청주보다 원주는 훨씬 더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소과는 시험과목에 따라 생원진사시(生員進士試), 시험장소에 따라 향시(鄕試)와 감시(監試)라고도 하는데, 유교 지식인으로서 소양을 평가하고 성균관 입학 자격을 부여하는 시험이다. 소과의 생원시험은 유교경전에 관한 지식을, 진사시험은 시와 산문 등 문장능력을 평가하였다. 암기력이 좋은 사람은 생원시가, 글 짓기가 뛰어난 사람은 진사 시험이 유리하였을 것이다. 1차 시험인 초시에서 한성부와 각 도별로 할당된 인원을 먼저 뽑은 뒤 2차 시험인 복시에서 최종 합격자를 뽑았다. 정기 시험은 3년에 한 번 전국에서 생원 100명, 진사 100명으로 모두 200명을 선발하였다. 소과는 관리 선발 시험인 대과와 독립된 시험제도였으나 대과에 응시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으므로 대과만큼 합격하기 어려웠다.

소과에 합격한 생원 또는 진사는 지식인에게 부여하는 일종의 학위였다. 관리에게 부여하는 직급(품계)도 아니고 실익은 없었지만, 명예를 존중하고 신분질서가 뚜렷한 조선 사회에서 지역사회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면 적어도 생원 진사로 불리는 지식인이 되어야 했다. 경제가 몰락하고 대과에 합격하여 관리를 배출하지 못한 몰락한 잔반(殘班)가문이 지역에서 양반으로서 권위와 명예를 유지하려면 생원, 진사가 되어야 했다. 

원주는 조선시대 500년 동안 강원감영 소재 도시였지만 도시 규모는 크지 않았다. 1789년 원주의 인구수는 37,909명으로 전국에서 44번째였다. 원주의 과거시험 소과 합격자는 수는 전국에서 네 번째이니 순도 높은 학세권인 셈이다. 원주가 이처럼 많은 합격자를 배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