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 전에 읽은 것 중의 하나로 「오래된 미래 : 라다크에서 배우다」 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스웨덴 출신의 여성학자 헬레나 노르베르-호지가 티베트의 라다크에서 16년 동안 생활하며 현지 체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1996년에 발행되었으니 요즘은 흔히 볼 수 없는 갱지 같은 누런 종이에 인쇄되었고 모서리는 더욱 짙게 변색되어 사람 같은 생체나이로는 더더욱 나이가 들어 보인다. 보다 말고 또 보다 말고, 열흘은 지나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지만 나에게는 깊은 울림을 가져다 준 책이었다.

저자가 라다크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본질적으로 서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였지만 변화는 빠르게 와서 두 문화의 충돌은 극적이었고 강력하고 생생한 대조를 보여 주었다. 티베트 고원의 원시적 문화가 생생하게 남아 있는 라다크 역시 서구 문명의 잠식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갈수록 서구 문화는 정상적이고 유일한 방식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책의 제목에서 쉽게 읽혀지듯이 라다크에서는 오래된 전통과 문화가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다.

「오래된 미래」를 읽고 나서 삼년 정도 지났을 때, 청룡의 해에 접어들어 음력으로 정월 열나흘(양력 2월 23일)에 외지인으로서는 드물게(처음이었을 수도 있겠다) 월호동(원주시 지정면 월송리)의 당제사를 참관하게 되었다. 사실 지난해에도 같은 시기에 당제사에 갔지만 여자는 제사에 참관할 수 없다는 마을 전통을 따라야 하기에 목적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함께 갔던 이가 유명한 여성 동화작가여서 마을 주민이든 방문객이든 규칙을 따라야만 했다. 결국 제사가 끝난 뒤에야 마을회관에서 주민들과 어울려 음복을 하고는 봉송으로 백설기를 얻어오는데 그쳤다.

지난번에는 당제사를 참관하지 못 했기에 이번에는 한 달여 전부터 월호동 당제사 날짜를 확인한 뒤 동화작가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혼자서 월호동 마을을 찾았다. 아직 시간이 다다르지 않아 마을회관에서는 삼삼오오 모여서 이런저런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중에는 마을 출신으로 원주 시내에 살고 있는 이도 있었고, 마침 그때 마을에서 목조 건축을 하는 서울의 기술자 가족들도 서넛 됐다. 주방에서는 여나뭇 정도 부녀회원들도 나와서 제사 음식을 준비했다. 이렇게 모인 스무 명 정도는 모두들 머리가 반백 이상으로 고령화된 농촌 마을의 현실을 보여 주었다.

시간이 다다르자 제관들은 과일과 떡, 북어, 제주 등을 지참하고 어두운 산길로 접어들었다. 마을회관에서 서낭당까지 거리는 어림잡아 1㎞ 정도의 짧은 거리였지만 캄캄하고 산길이라 제관들 틈에 끼어 코란도 스포츠를 타고 이동을 했다. 마을 뒷산은 청백산으로 마을을 감싸 안아 품듯이 자리 잡은 형상이었는데 칠 부쯤 되는 지점에 서낭당을 앉혔다. 서낭당은 원래 흙벽돌의 석면 슬레이트 지붕이었는데 십수년 전에 '참 살기좋은 마을' 보조사업을 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개축했다. 진흙으로 미장 마감한 한 칸 규모의 소박한 제실이었지만 지붕만은 맞배 형식에다 전통 기와를 올려 웅장한 자태를 뽐내었다.

어렵지 않게 서낭당에 도착했을 때는 미리부터 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상을 차리는 동안에 안내판을 읽어보니 이런! 그때까지 으레 서낭당(혹은 성황당)으로 알고 있었는데 청백산에는 선황당(仙皇堂)을 앉히고 신선으로 여신을 모셔왔던 것이다. 유레카! 지난해 동화작가가 참관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월호동 선황제(仙皇祭)는 술시에 해당하는 밤 여덟 시에 올렸는데 자그만치 그 역사가 오백년을 훌쩍 넘는단다. 월호동이 속한 월송1리 정계봉 이장에 따르면 구전되는 마을 역사는 육백여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여 년이 흐르는 동안 마을의 모양이 갖춰지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그때부터 여신을 모시고 당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매년 정월 열나흘에 지내온 선황제는 6.25가 나던 다음 해부터 마을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제를 올리지 못했단다. 그래선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해부터 마을에는 액운이 들어 재산 목록 1호였던 소들이 나자빠지는 등 화를 당한 집이 열 집은 족히 넘었다는 얘기였다.

이에 놀란 사람들은 청백산의 여선황(女仙皇)이 배가 고파 마을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을 거라면서 다음 해부터는 빠지지 않고 선황제를 지내게 되었고, 그 후로는 지금까지 한 해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다음부터는 월호동에 액운이 사라졌는데 평안이 깃들어 이 마을 출신으로 국회의원도 나오고 성공한 사업가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는 얘기.

되짚어보면 사실 이렇게 구전되는 얘기들은 <전설따라 삼천리> 같기도 하고 요즘 세상에 무슨 그런 일이 있으랴는 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특히 종교 신자들 가운데는 이렇게 전해지는 전통을 미신이라 배척하기도 하는데, 심지어는 멀쩡히 서 있는 장승을 밤에 몰래 베어 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에는 마을의 고목과 서낭당, 장승이 '미신타파'라는 구호와 함께 대거 베어지고 철거당하는 수난이 이어졌다. 전통은 사라지고 마을의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상징이 없어지니 인심은 흉흉해지고 점점 더 삭막한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미래」의 저자 역시 라다크에서도 원래 행복했던 사람들이 진보로 인하여 서구적 규범에 따라 살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평온함을 잃어버리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당장 눈앞의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전문가들이 의존하는 서구 문화는 나무를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며 장기적인 관점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다래마을'이라고도 불리는 월호동에서는 선황제(仙皇祭)를 전승하고 유지하는데 지금은 많이 힘겨워하고 있다. 농촌 마을의 대체적인 현실이지만 젊은이들은 나이가 들어 경로 우대를 받게 되었고, 이마저도 유명을 달리 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점점 그 수가 줄어들고 있다. 

때마침 지정면에는 기업도시가 들어서고 젊은 인구가 유입되어 원주시에서도 활기 넘치는 동네가 되었다. 월호동까지는 자동차로 오분 내외, 섬강 다리를 건너면 한국의 라다크일 수도 있는 다래마을에서 때때로 '오래된 미래'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청백산의 숲길을 걸으면서 도시와 농촌, 남성과 여성, 문화와 자연 사이의 지속 가능한 균형을 향해 긴급히 방향을 돌려야 한다고 역설하는 헬레나 노르베르-호지를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 자신과 지구를 치유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박전하 살구나무예술농장 대표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