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막읍 후용리 견훤산성 남쪽의 무너진 성벽과 흩어진 성돌.

과거 전통시대에 성을 쌓는 일은 당대 최대의 토건 공사였다. 하나의 성을 쌓는 일은 수년 또는 수십 년에 이르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지금처럼 능률 좋은 중장비도 없었으니 모든 작업은 몸으로 해야 하는 고된 일이었다. 

성 쌓는 일에 동원된 백성들이 돌을 나르고 쌓는 손에서 피가 흐르고 무릎이 깨져 피가 흐르는 것은 흔한 일이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맨몸으로 오르기도 힘든 높고 험준한 곳에 쌓는 산성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우리나라 도처에는 많은 성이 있다.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국경에 쌓은 장성과 국왕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도성은 국가와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국가에서 주도하여 쌓은 장성과 도성, 일부 읍성과 산성은 성을 쌓고 관리한 기록이 있지만, 성을 쌓은 시기와 사람을 알 수 없는 성도 있다. 수년 또는 수십 년이 걸리고, 수백 명이 동원된 대규모 토건공사 기록이 없으니 이상한 일이다.  

'신문왕(神文王) 5년(685)에 성을 쌓았다. 둘레는 1,031보(步)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인데 원주에 있는 산성 4개의 산성 중 언제, 누가 성을 쌓았는지 알려주는 유일한 문헌 기록이다. 685년 신라 신문왕 때 쌓은 이 성은 지금까지 영원산성으로 알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해미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필자의 생각도 같다. 나머지 치악산에 있는 2개의 산성과 문막에 있는 견훤산성은 문헌상으로는 성을 쌓은 시기도 쌓은 주체도 알 수 없다. 

그나마 이름으로는 성주가 분명한 문막 견훤산성은 바람이 전하는 이야기이다. 때로는 기록보다 풍문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더 넓게 더 오래 퍼지는 경우가 있다. 말은 전하는 입과 듣는 귀에 따라 윤색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말의 원형은 오래 살아 전한다. 

우리가 아는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어서 패자들의 기록은 삭제되거나, 더러 전하는 패자의 모습은 포악한 인간으로 각색되기도 한다. 그러니 사실이 왜곡되는 것은 바람이 전하는 말과 같다. 그러나 풍문의 원형은 오래 전하지만 기록에서 지워진 패자들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필자는 가끔 축성 기록이 없는 원주의 3개 산성은 '승자들의 기록에서 못된 인간으로 규정한 패자들이 쌓은 성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원주를 무대로 활동한 양길과 궁예 그리고 견훤, 그들이 직접 성을 쌓지는 않았더라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그들과 그들에게 몸을 맡기고 뜻을 같이한 민중들이 함께 활동했던 근거지가 바로 산성이 아닐까!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영웅들에게 산성은 훌륭한 둥지가 된다. 저물어가는 신라 말 양길장군이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하여 떨쳐 일어나고, 버림받은 신라의 왕자 궁예 대왕이 양길대장에게 몸을 맡겨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던 혁명의 진원지가 원주의 산성이었을 것이다. 원주의 산성을 근거하여 의기투합한 두 영웅, 양길과 궁예는 서쪽으로는 경기와 충청으로, 태백산맥을 넘어 동으로, 다시 북진하여 마침내 새로운 나라 후고구려를 세운다. 

10여 년 전 박물관에서 일할 때 외지에서 찾아온 방문객이 필자에게 물었다. 원주의 역사 중 빛을 발한 때가 언제였는지. 필자는 실체는 없지만, 신라 말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시기가 원주가 가장 빛났던 시기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비록 강원감영처럼 훌륭한 건축물도 거돈사와 법천사, 흥법사 터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석조 문화유산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한국중세를 연 영웅들이 서사를 남긴 시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무너진 돌덩이에 불과하지만 원주의 산성은 영웅들의 서사를 품고 있는 유산이다. 우리가 보살펴야 할 이유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