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훤산성에서 바라본 건등산과 문막 평야.

치악산에 위치한 영원, 해미, 금두산성 외에 원주에는 또 하나의 산성이 있다. 문막읍 후용리에 있는 견훤산성이다. 치악산의 3곳 산성이 북원경과 고려시대 원주 그리고 조선시대 강원감영의 행정관청을 방어하기 위한 국방시설이라면 견훤산성은 후삼국 시기 영토확장을 위한 영웅호걸들이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군사시설이다. 봄기운이 완연한 2월 28일 10여 년 만에 견훤산성을 찾았다. 

원주 견훤산성은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는 문막읍 후용리에 있다. 정확한 위치는 문막읍 후용리 산 2번지를 중심으로 산 1번지와 산 3번지에 걸쳐있다. 고속도로와 인접해 있어 고속도로 하행선 운전자에게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이다. 자동차로 견훤산성을 찾아가려면 문막대교에서 앞에서 우회전하여 섬강을 따라가다 궁촌리 방향으로 접어들자마자 오른쪽 폐도 100m 정도에 있는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지하통로를 통과하면 견훤산성으로 오르는 계곡 길과 마주한다.    

견훤산성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주(城主)가 분명한 산성이다. 통일신라가 끝날 무렵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한 영웅들이 활약한, 이도학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열정의 시대'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인 견훤이 쌓은 성이다. 경북 상주시의 견훤산성과 전북 전주시에 있는 견훤산성(남고산성), 원주 문막의 견훤산성 모두 성주가 견훤이다. 상주와 전주의 견훤산성은 지방문화재로 지정되거나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원주 견훤산성은 잊혀진 산성이다. 

견훤(867∼936)은 경북 상주(지금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난 신라의 무장(武將)이다. 889년 무렵 반란을 일으켜 900년 완산주(지금 전주)를 중심으로 후백제를 건국하여 후삼국시대의 문을 연 영웅이다. 후백제의 국왕이 되어 부패한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를 점령하고 고려의 궁예, 왕건과 세력을 다투었으나 935년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고려에 투항하였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을 공격할 때 앞장선 비운의 운명이다. 삼국유사에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 '이제가기(李磾家記)'를 인용하면서 견훤이 원래 이씨였으나 견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대체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과 민심은 승자들의 편이어서, 후세에 전하는 역사서들은 승자들의 칭송에 후하지만 패자들에게 가혹하다. 우리 역사에서도 궁예와 견훤, 양길을 도적이거나 성격이 포악한 사람으로 조작하고 폄하한다. 그러나 '견훤이 아기였을 때 범이 나타나 젖을 먹여준 적이 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새가 와서 덮어주고 범이 와서 젖을 먹였다'는 제왕운기의 기록을 보면 견훤은 영웅이나 왕의 기운을 타고 났음을 알 수 있다. 

문막 견훤산성은 나지막한 야산 봉우리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린 두 능선이 계곡을 감싸고 있어 말굽과 닮은 모습이다. 문막 뜰과 섬강, 건등산이 바라보이는 북쪽은 암벽이 있고, 궁촌천이 감싸고 흐르는 동쪽은 바위가 없지만 경사가 급해서 토성처럼 보인다. 고속도로와 접한 북쪽으로 열린 완만한 계곡을 따라 동쪽 능선으로 올라가면 쉽게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성안평지에는 여러 기의 무덤이 있고 산성의 흔적은 찾을 수 없는데, 성에서 가장 높은 남쪽 봉우리에 올라서면 제법 많은 돌들이 흩어져 있어 옛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성의 흔적은 남쪽과 서쪽 능선을 따라 무너진 석성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견훤산성 북쪽에는 북에서 남으로 섬강이 흐른다. 산성 동쪽은 궁촌천이 흘러와 섬강과 만나는데 포진리(浦津里)이다. 과거 남한강과 섬강을 오가던 나룻배가 드나들던 곳이니 육로와 수로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병자년 대홍수가 나기 전 섬강은 지금보다 더 산 아래로 흘렀다고 한다. 고대 수운교통의 요충지인 강 옆에 성을 쌓은 영월의 정양산성과 단양의 왕검성보다 더 강과 가깝다.   

견훤산성을 답사하고 포진리 삼괴정 경로당을 찾았다.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기 위해서다. 회관에서 팔십이 넘은 노인 세 분을 만났다. 노인들은 '건등산에 진을 치고 있던 왕건 군이 쏜 화살은 견훤산성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견훤산성에서 쏜 화살은 건등산까지 날아갔다. 전세가 불리한 왕건이 꾀를 내어 석회를 강물에 풀자 쌀뜨물 처럼 보인 강물을 먹은 견훤의 군인들이 배탈이 나서 전쟁에서 졌다.' 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견훤산성에는 뱀이 많고 사람을 물지 않는데, 견훤산성에서 숨진 군인들의 혼이 뱀이 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모두 바람이 전하는 이야기이다.

후삼국시대 견훤과 왕건의 치열한 전투에 대한 기록은 당대는 물론 후대의 역사서에도 찾을 수 없다. 견훤산성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이기(1522-1600)의 송와잡설에 나오는데, 역시 당시 세간에 전하는 말을 옮겨 적은 것이다. 그 밖에 1940년에 편찬된 <강원도지>와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견훤산성의 존재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금두산성과 함께 견훤산성에 대한 조사도 시급한 일이다. 천여 년 전 새로운 시대를 연 영웅호걸들의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니 산성에 대한 조사연구와 정비를 진행하면 관광자원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