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흰 눈이 소복히 내려앉은 겨울 치악산. 치악산에는 영원, 금두, 해미(금대) 세 개의 산성이 있다.

필자가 원주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살피기 시작한 것은 1995년이다. 게으르고 아둔한 필자가 그동안 원주의 역사에 대하여 풀지 못한 의문이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치악성이다. 이 궁금증은 고려와 카단(합단) 전쟁에서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원충갑 장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영원산성대첩제 준비를 위하여 영원산성을 올랐을 때부터 품었던 오랜 숙제이다. 

고려사에는 치악성 전투를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기마병이 주력인 카단군이 험준한 치악산 영원산성까지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영원산성에는 남문과 북문 두 개의 성문이 있다. 두 문 모두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고 있어 말은 물론 사람이 오르기도 어려운 곳이다. 고려사의 기록처럼 원충갑 장군이 성문 밖을 나아가 카단의 기마병을 물리치고 말을 빼앗는 장면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원주 치악산에는 3개의 산성이 있다. 영원산성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해미(금대)산성과 금두산성은 문화유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잘 모르는 산성이다. 해미산성은 판부면 금대리와 관설동 섭재 마을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어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산성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금두산성은 남대봉 아래 고지대에 있고, 남아있는 성곽의 흔적이 뚜렷하지 않아 산성 연구자들과 시민들에게 주목받지 못한 산성이다.  

원주의 치악산에 처음 성을 쌓은 사람들은 신라인들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북원경은 본래 고구려 평원군인데, 문무왕이 북원소경을 설치했다. 신문왕 5년(685)에 성을 쌓았는데 둘레는 1,031보이다.' 물론 이 기록에는 치악산이라는 언급이 없어 치악산에 남아 있는 3개의 산성을 가리키는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고려와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읍성을 찾을 수 없고, 조선시대 도시의 원형이 대체로 잘 남아 있었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유적조사에서도 원주에서 읍성의 존재를 찾지 못하였다. 따라서 신라인들이 북원소경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치악산에 남아 있는 3개의 산성중 하나라고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인이 북원소경에 쌓은 성은 1,031보이다. 보(步)는 어른 한걸음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인데, 우리나라를 비롯한 유교 문화권에서는 중국 주나라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주척(周尺, 도량형 제도)을 사용하였다. 주척은 시대에 따라 길이가 다르기는 하지만 조선 세종 때에는 어른의 손바닥 한 뼘 길이인 1척을 31.22cm로, 1902년부터 30.3cm를 1척으로 정하였다. 1보는 6척이니 1.82m이다. 신라인이 북원소경에 쌓은 성의 길이 1,031보는 1,876m이다.   

1998년 필자의 의뢰로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영원산성과 해미산성 정밀 실측조사 당시 측량한 영원산성은 2,400m 이고 해미산성은 1,830m이다. 또한 조사 당시 영원산성에서는 신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지만 해미산성에서는 신라 토기를 발견하였다. 산성의 길이와 성안에서 발견된 유물은 삼국사기의 기록이 전하는 신문왕 5년(685) 신라인이 북원소경에 쌓은 성은 해미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하게 한다. 

영원이라는 성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세종실록 지리지인데, '영원산석성(靈原山石城)이 주(州) 동쪽 30리에 있다. 둘레가 6백 46보(步)이며, 샘이 2가 있는데, 사계절 마르지 아니하며, 또 창고 9간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의 길이는 현재 영원산성과 다르지만 성의 위치를 지목하는 '주의 동쪽 30리에 있다'는 기록은 다른 두 개의 성보다 영원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해미산성과 금두산성은 언급이 없고 영원산성에 창고 9간이 있다는 기록은 성이 당시까지 사용되거나 성의 존재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고려와 카단(합단)의 전쟁 당시 원주 치악성에서 카단군을 물리친 사실은 고려사의 기록이다. 고려사는 세종의 명령으로 시작되어 문종 원년에 편찬된 관찬사서이다. 세종실록이 편찬된 시기와 같은 시기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당시 사관들은 영원산성과 치악성 모두 알고 있었다. 영원산성의 존재를 알고 있던 사관들이 카단을 물리친 원주의 산성을 영원산성이라 하지 않고 치악성이라 기록한 것은 실제 카단과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 영원성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흰 눈이 쌓인 치악 산맥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733년 전 고려 카단 전쟁 때 카단을 물리친 치악성은 어디일까?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