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호저면의 열녀암 암각문을 조사하면서 MZ세대라 일컫는 여대생에게 '열녀'에 대해서 물었더니, 최근의 드라마 열녀박씨 계약결혼뎐을 봤느냐고 되물었다. 열녀박씨 계약결혼뎐은 조선시대와 현대를 넘나들면서 '열녀박씨'를 재조명하는 관점이기에 MZ세대들이 관심을 가진 드라마이다. 조선시대에선 죽었지만, 현대에선 죽지 않고 박씨와 결혼한다는 해피엔딩의 이야기이다. 

열녀라는 말은 중국 전국시대에 제나라 왕촉(王   )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라는 말을 쓰면서 처음 등장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 열전에 설씨녀와 도미 부인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려사 열녀전에는 12건 14명의 열녀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고려 말의 여성들로 전란 시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여성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여성관을 정책적으로 장려하기 위하여 열녀를 포상하는 이른바 정표정책(旌表政策)을 펼쳤으며, 삼강행실도 열녀전 등을 간행하고 반포하였다. 또한 동국여지승람 읍지 등에도 열녀조를 수록하여 후세의 규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러한 열녀 이데올로기는 상층계급에서 하층계급으로 침투되어 조선 사회에 널리 일반화되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발생한 수많은 열녀는 유교적 여성관의 학습 결과라 하겠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열녀로 정표된 수는 효자, 충신을 합한 수보다 약 3배나 많다. 조선 후기에는 남편이 병사하자 따라 죽는 순절(殉節)이 많았다. 순절이 본격적인 열녀의 상징으로 등장한 것은 17세기 이후이며 18, 19세기로 가면서는 더욱 심해졌다.

조선 초기에는 수절하는 여성이 주로 포상되었으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남편이 죽은 후 따라 죽거나 외간남자로부터 정조를 지키기 위해 죽은 여성, 그리고 남편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등의 극단적인 행위를 한 여성들이 열녀로서 포상 받았다.  급기야 여성들이 정절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고, 과부의 수절이 여성의 의무인양 생각하는 풍속이 팽배하였다. 

물론, 열녀의 비인간적 측면과 허구성에 대한 비판도  대두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열부론>에서 정절의 허위성을 논하였다. 즉 남편이 편하게 제 명대로 죽었는데도 아내가 따라서 죽는 것은 제 몸을 죽였을 뿐이고, 제 몸을 죽인 것이 의리에 합당한 것은 아니며 성정(性情)이 좁은 것뿐이라고 하였다. 

원주시 호저면의 열녀암은 18세기 조선시대 열녀의 형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대부분 정려각이나 정녀비 등으로 표창되고 있는데 반해, 암각문으로 전한다는 것이 특별하다. 원주시에서 펴낸『지명유래집『전설집에서는 "예전에 이애신의 처 김씨가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들어온 도둑에게 욕을 당하자 '이미 더럽혀진 몸이 어찌 남편을 대할 수 있겠느냐'고 한탄하며 이 바위 위에서 봇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한다. 앞면에 '열녀암' 석 자를 새기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영조때 편찬한『여지도서 원주목 열녀조에서는 "김씨는 양인 이애신의 아내로 일찍 과부가 되었으며 자식이 없었다. 정결을 스스로 지키며 시부모를 섬기며 효성을 다하였므로 마을에서 칭송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녀의 어짊을 사모하여 배우자로 삼고자 요구하였으나, 그녀는 이야기를 듣고 부끄러워했다. 또한 협박이 두려워 집 뒤의 바위에 올라가 깊은 못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마을 사람들이 그 바위를 가리켜 열녀암이라 부르고, 이를 바위에 새겼다."고 하였다.

여지도서의 기록을 통해 열녀 김씨의 행적은 3백년 전의 사실임이 확인된다. 암각문을 조성한 주체는 마을주민이다. 인근에 칠봉서원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서원 유림의 공의로 추진되었을 것이다. 구전되는 자료에서는 "외적에게 침탈당한 부녀자의 순절"이라는 일반적인 열녀 양상으로 나타나 있어 익숙한 내용이다. 

그런데, 여지도서의 기록은 현대의 MZ세대들이 공감하기엔 거리가 멀다. 삼국시대의 설씨녀와 도미 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외간 남자의 집요한 청혼으로 죽음 택한 열녀 김씨의 행적을 MZ세대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재혼' '삼혼' '사실혼' '졸혼' 등의 용어가 낯설지 않은 현시점에서 부부의 결합이 '일심동체'라는 말도 설득하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열녀 김씨'를 MZ세대들에게 어떻게 전달할지는 더욱 막막하다. 

드라마의 전지적 시점인 조선시대와 현대로 넘나들면서 '열녀 김씨'를 되새겨 생각하였다. 열녀박씨 계약결혼뎐 드라마를 MZ세대들이 선호하는 이유를 들어보니 상통하는 관점이 없지 않다. 아니 핵심일 수 있는 주제가 있다. 열녀는 '열렬히 사랑한 여자'이다.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사랑하는 여자이기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열녀암의 이애신 처 김씨는 조선시대의 열녀 이데올로기에 의해 타의적으로 죽음을 택했다고 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 남편을 사랑했기에 몸을 던질 수 있었던 김씨를 거듭 추모한다. 열녀 김씨는 지금 어딘가에서 남편 이애신과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홍순석 강남대 명예교수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