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96년 개최된 제1회 원주영원산성대첩제. 영원산성 입구에 마련된 제단에 많은 인파가 모였다.

1996년 1월 21일(양력 3월 10일) 판부면 금대리 영원사 계곡 마지막 다리를 건넌 트럭이 가파른 언덕길에 멈추어 섰다. 계곡을 따라 이어진 찻길 중 가장 경사가 급한 구간이다. 평소에도 차가 다니기에 조심스러운 길이지만 전날 내린 눈으로 길이 미끄러워 트럭이 멈추어 선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대여섯 명이 눈길에 멈춘 트럭을 미느라 애쓰지만 언덕길에 멈춘 트럭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 트럭에 실린 짐은 제1회 영원산성대첩제 행사 물품들이다. 제의에 사용될 제물과 병풍, 헌관들이 입어야 할 제복을 운반하는 트럭이니 움직이지 않으면 낭패다.

영원산성대첩제는 1290년 고려를 침략한 몽고의 카다안(합단) 군을 맞아 1291년 1월 21일(음력) 원주 치악성에서 물리친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이다. 전쟁이 끝나고 705년 만에 과거 고려 왕조의 전쟁을 기념하는 축제를 개최한 것은 당시 박형진 원주문화원장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형진 문화원장은 충주 사람으로 원주에 정착하여 상업 활동을 하면서 원주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깊었다. 1995년 영월군에서 원주시로 자리를 옮긴 필자는 문화재관련 업무와 지역사, 문화원 지원 업무까지 담당하고 있었으니 박형진 문화원장과는 업무 파트너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박형진 문화원장은 필자를 만날 때마다 고려 카다안 전쟁 승리의 발판이 된 치악성 전투에서 원충갑 장군의 승전을 기념하는 영원산성대첩제를 개최하고, 원충갑 장군과 임진왜란 때 영원산성에서 전사한 김제갑 원주목사와 원호 장군을 모신 충렬사를 복원하는 일이 오랜 소망이라고 말하곤 했다. 1995년 1월 원주시로 자리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은 필자는 박형진 원장의 제안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 살펴보기 위하여 1995년 5월 영원산성을 답사하게 된다. 영원산성은 험준하기로 소문난 치악산 서쪽 산릉에 위치하고 있어 그동안 돌보지 않았다.  

원주 학성동에 있었던 충렬사는 고려와 조선을 아울러 원주를 대표하는 무장(武將)과 김제갑 목사를 모신 사당이니 박형진 원장의 제안이 타당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필자는 박형진 문화원장이 제안한 충렬사 복원과 영원산성대첩제 행사 개최에 더해 영원산성 정비사업도 함께 추진하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하였다. 영원산성 정비와 충렬사 복원 두 사업 모두 많은 예산이 필요한 사업으로 사업의 당위성 확보를 위하여 영원산성대첩제를 개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하여 원주문화원에 보조금을 지원하게 되었다.

700여 년 전 고려 카다안 전쟁의 승전을 기념하는 사업은 3개 사업으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모두 지지부진하여 필자의 애를 태웠다. 영원산성 정비사업은 1997년 지표조사와 정밀실측조사를 시작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 성곽 정비복원을 착수하였으나, 충렬사 복원사업은 부지를 확보하지 못하여 한동안 사업이 표류하기도 했다. 부지확보가 어려웠던 것은 충렬사 복원은 인물을 선양하는 사업이니 사당에 배향된 3개 문중에서 부지를 기증받아 추진하려는 사업 방침 때문이었는데, 문중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 중 충렬사 복원을 위한 최적의 부지가 없었고 토지교환도 어려웠다.      

다행인 것은 당시 원주시 행정을 이끌었던 김기열 원주시장의 큰 관심에 표류하던 사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김기열 원주시장은 문화예술과 문화유산을 정비하고 돌보는 일에 누구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나라 안에서 정상급 수준이라고 평가받는 시립교향악단 창단을 주도하였고, 필자가 담당했던 원주시사 편찬, 영원산성 정비복원, 충렬사 복원사업도 김기열 시장의 관심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996년 제1회 영원산성대첩제는 박형진 문화원장이 위원장을 맡아 행사를 총괄하였고, 한학자 김교희 선생이 부위원장으로 행사를 주관하였다. 김교희 선생은 괴산 충민사에서 보관하고 있던 원주 충렬사의 사액현판을 찾아 고증하기도 했다. 영원산성대첩제 개최 목적은 대첩제를 통한 산성복원과 전통문화계승발전, 조선 현종 때 건립된 충렬사 복원, 원주시민의 충효 및 애향심 고양이었다. 말초를 자극하는 유희성 축제가 아니라 도시정체성을 고양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었다. 

세계 전쟁사에서 몽고와 전쟁에서 처음 이민족이 승리한 고려 거란전쟁의 전승기념 축제로 전쟁이 끝난 후 705년 만에 열린 영원상성대첩제는 국내에서 처음 개최된 의미 있는 행사였다. 영원산성대첩제는 2008년 제13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당초 행사 목표인 충렬사복원과 부분적이지만 영원산성 복원정비 사업을 완료하였으니 사업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그러나 애향심 고양이라는 목표는 아직 남아있다. 

원주 치악성에 이어 고려 카다안 전쟁의 또 다른 승전 장소인 세종특별자치시에서는 2000년부터 개최한 연기대첩제를 지금도 이어오고 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