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6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열다섯 살 어린 나이에 6.25를 겪으셨고 할아버지와 가족을 이끌고 피난을 가셨다고 한다. 소 등위에는 짐과 핏덩이 동생을 껴안은 어머니를 태우고 나머지 가족들은 손에 보따리를 들고 한겨울 피난길에 나섰다고 한다. 

남쪽으로 향하던 중 충주에서 만난 달래강(현 달천강)을 건너는 것은 큰 난관이었다. 얼음이 두껍게 얼지 않아 빙판길을 피해 얼음이 얼지 않은 여울 살을 건너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물살이 거센 여울 살을 건너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힘이 약한 어린아이들이나 부녀자들은 물살에 휩쓸려 깊은 강 속으로 떠내려가 얼음 속으로 빠져 죽기 일쑤였다. 가족들을 소에 태워 서너 차례 강을 건널 때마다 소 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부녀자들 때문에 가족들이 위험해 처했던 이야기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뇌리를 스친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삶은 고됨의 연속이었다. 맏아들이 농사를 이어받아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시작하셨다. 가난하고 먹을 게 부족하던 시절 고된 노동 후 허기짐은 혈기 왕성한 청년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 허기짐을 알기에 할아버지는 할머니 몰래 자신의 밥그릇에서 몇 숟가락의 밥을 아버지에게 떠넘기시곤 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 밑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중 집안의 장남은 조혼시킨다는 풍습에 따라 열아홉의 나이에 어머니와 결혼하고 출가하셨다.

어렵던 시절이라 혼수품은 숟가락에 쌀 한 말이 전부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쌀 떨어질 걱정에 남의 집 품도 팔고 나무도 해 장작을 내다 팔았지만, 형편이 쉽게 나아지지 않아 나무뿌리로 죽을 쑤어 먹으면서 생계를 이어 갔다고 한다.

어려운 살림살이에 도끼 살 돈이 없어 할아버지께 도끼를 빌려 쓰곤 했는데 잘 빌려주지 않아 서운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 생각에야 그까짓 도끼가 뭐라고 사지 못하고 얻어쓰나 하겠지만 그만큼 궁핍하고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결혼 후 6남매를 낳으셨는데 첫째에서 셋째까지는 아들만 낳으셨고 넷째로 딸을 보시고 이제 마지막이다 했는데 덜컥 어머니가 임신하셨다고 한다. 더 청천벽력은 임신한 아이가 쌍둥이라는 사실이었다. 4남매 키우기에도 생계가 어렵던 시절이라 임신중절 수술을 하려고 여기저기 수소문했지만 임신 개월 수가 많아 수술을 할 수가 없었고 그렇게 태어난 게 필자와 쌍둥이 동생이다.

여섯 남매가 동시에 학교를 다닐 때는 교납금이 부족해 어머니가 이웃집에 돈을 빌리러 다니던 적도 종종 있었다. 아버지는 타고난 강골이어서 힘도 세고 일도 잘하셔서 늘 동네일에 앞장서셨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아마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무게가 아버지를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는 가장의 무게를 두 어깨, 두 다리로 굳건히 견디어 내셨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살림살이는 차츰 나아졌고 그런 이유에서 학창 시절 학생 기록지에 항상 중산층이라고 기재했던 기억이 난다.

1937년생이신 아버지는 올해 88세가 되셨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아버지를 보면 공감이 가지 않는 말이다.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하신 아버지는 어깨 인대도 거의 다 끊어져 없고 무릎연골 또한 다 닳아서 오랫동안 관절염으로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의 고통을 줄여보고자 많은 고민 끝에 작년 여름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했다. 그 결과 아버지에게는 지팡이라는 새로운 다리가 하나 생겼다.

오랜 세월 인생의 무게를 두 다리로 굳건히 지탱해 오셨는데 이제는 일상생활의 무게조차 지팡이에 의지하게 되었다.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처럼 까마귀 새끼도 자라면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고 하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부모에 대한 효는 더 말할 나위 없지 않겠는가? 

갑진년 새해에는 모든 가정이 행복하고 건강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부모님께 든든한 지팡이가 되길 바란다.

곽희운 전 원주시의원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