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산성에서 바라본 영원산성.

모든 전쟁이 고통스럽지만 매서운 추위를 견뎌야 하는 겨울 전쟁은 전쟁 당사자에게 더욱 고통스럽다. 과거 원주에서 벌어졌던 겨울 전쟁은 모두 두 차례이다. 1291년 1월(음력) 고려-합단(哈丹, 카다안) 전쟁과 1951년 1월에 벌어진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의 전환점이라 평가하는 원주전투 기간의 기후는 영하 30도까지 떨어져 총탄에 의한 사망자만큼 얼어 죽는 병사가 많았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추웠다고 한다. 

요즘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고려 거란전쟁이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강감찬 장군의 살수대첩과 양규 장군의 흥화진 전투는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알 정도로 유명한 전투여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다. 중국 수와 당, 왜(倭)와의 전쟁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고려와 합단과의 전쟁은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합단(카다안)이 국가 명칭이 아니라  사람 이름, 확대 해석하자면 몽골의 씨족을 이르기 때문이다. 합단은 누구일까!

합단은 아시아와 유럽, 구대륙 인구의 1/20을 학살하고 세계제국을 건설한 칭기즈 칸과 혈연을 같이하는 몽골의 황금씨족이다. 황금씨족은 원나라를 세운 칭기즈 칸의 후손으로 몽고의 많은 부족 중 황금씨족만이 칸이 될 수 있었다. 칭기즈 칸은 원나라를 건국하고 가까운 혈족인 아들과 동생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주고 왕으로 대우해 준다. 그중 3명의 동생 카사르, 카치운, 옷치긴에게는 만주와 요동 지역의 영토를 나누어 주었는데 이를 동방 3왕가라고 한다. 카단(합단)은 칭키즈 칸의 동생 카치운의 손자이다. 칭기즈 칸의 손자인 원나라 5대 황제 세조 쿠빌라이 칸과도 가까운 혈족이다. 

고려 합단 전쟁의 시작은 몽골의 내부 세력다툼에서 비롯된다. 1285년 원 세조 쿠빌라이는 3명의 삼촌들이 동방 3왕가를 이루고 있던 만주와 요동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동방 3왕가의 형제들은 연합하여 원의 세조 쿠빌라이에게 대항하는데, 옷치킨의 손자 나만은 반란을 일으켜 북경을 공격하게 된다. 원의 세조 쿠빌라이는 7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쟁에 나가 나만을 죽이고 반란군을 평정한다. 그중 합단은 끝까지 저항하다 1290년 1월 3왕가 중 마지막으로 패하고 고려를 침공하게 된다. 

당시 고려의 충렬왕은 원나라 쿠빌라이 칸의 딸 쿠툴룩켈리쉬(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여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된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고려 26대 충선왕인데 쿠빌라이 칸은 외손자 이지리부카(충선왕)를 무척 총애했다고 한다. 원과 합단의 입장에서 보면 고려를 침공한 것도 몽골족 간의 내전인 셈이다.

1290년 1월 고려의 동북쪽 국경도시 회령을 거쳐 경성, 길주, 단천, 북청, 함흥 등 동해안 루트를 따라 남진한 합단의 기마병은 남진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지만 고려군의 저항도 없었다. '합단의 군사 수만 명이 화주(和州, 영흥)와 등주(登州, 안변) 두 고을을 함락시켜, 사람을 죽여서 양식으로 하고 부녀자들을 윤간하고는 포(脯)를 떴다.'는 고려사의 기록처럼 합단군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포악했기 때문에 맞서 싸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몽골군의 말발굽 소리만 들어도 혼비백산하여 도망했다는 유럽 사람들과 같은 사정이다. 그러나 원주 사람들은 달랐다. 원주에 도착한 합단의 군대를 맞이하여 원주의 방호별감 복규가 지휘하는 고려군은 치악성에서 합단을 맞아 싸웠는데, 고려사에 기록된 당시 전투 상황을 눈으로 보듯 사실적으로 전하고 있다.

"갑인일에 합단이 원주(原州)에 주둔하고, 50명의 기병(騎兵)이 치악성(雉岳城) 아래에 이르러 소와 말을 약탈해 갔다. 원주 별초 향공진사(原州別抄鄕貢進士) 원충갑(元沖甲)이 보병 6명을 인솔하고 이를 추격하여, 적의 말 8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무오일에 적 도라도(都剌  )ㆍ독어내(禿於乃)ㆍ발란(   蘭) 등이 군사 4백 명을 거느리고 또 성 아래에 이르러, 운반하는 본주의 녹봉미(祿俸米)를 획득하고 매우 기뻐하였는데, 충갑이 결사대 중산(仲山) 등 7명과 함께 나아가서 이를 엿보고 있다가, 중산이 먼저 적속에 뛰어들어 한 사람의 목을 베고, 이어 형문(荊門) 밖까지 추격하였다. 적이 모두 말을 버리고 달아나 말 25필을 얻으니,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가 크게 기뻐하여 노획한 안장한 말을 그에게 주었다. 기미일에 적이 또 와서 기[旗]와 북[鼓]을 앞세워 기세를 올리며, 먼저 한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와서 유도하였다. 충갑이 나아가 편지를 가지고 온 자를 베고, 그 편지를 머리에 매달아 던졌는데, 적이 모두 물러가 성을 공격할 기구를 더욱 정비하니, 성중 사람들이 동요하며 두려워하였다. 경신일에 적이 양근(양평)성에서 잡아간 여자 두 사람을 보내어 성 아래에서 유인하자, 충갑이 또 이들의 목을 베니, 적은 북과 함성을 울리고 전진하면서 온갖 계략을 써서 성을 공격하였다. 화살이 빗발같이 쏟아져서 성이 거의 함락 직전에 놓여 있었는데, 흥원창판관(興元倉判官) 조신(曹愼)이 성 밖으로 나가 마주 싸우고, 충갑이 돌연 동쪽 봉우리에 올라가 적 한 명을 베니, 적이 점차 혼란스러워졌다. 별장 강백송(康伯松)이 종 도니(道尼) 등 30여 명과 함께 싸움을 도왔고, 고을의 아전 원현(元玄)ㆍ부행란(傅行蘭)ㆍ원종수(元鍾秀)가 국학 양정재(國學養正齋)의 유생 안수정(安守貞) 등 1백여 명과 함께 서쪽 봉우리로부터 내려가서 합세하여 공격하는데, 조신이 북채를 잡고 북을 울리다가 날아온 화살이 바른 팔뚝을 관통하였으나 북소리는 여전하였다. 적의 앞 대열이 조금 퇴각하니, 뒤에 있는 자들이 놀라고 소란스러워져서 저희들끼리 서로 짓밟았다. 이에 고을의 군병이 힘을 합해 공격하니, 함성이 산악에 진동하였다. 도라도 등 68명을 베고, 사살한 자가 거의 반이나 되었다. 이로부터 적의 예기(銳氣)가 꺾이어 감히 다시 공격해 오지 못했고, 여러 성도 또한 굳게 지켜 비로소 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 생겼으니, 이는 모두 충갑의 공이었다."(고려사절요 제21권, 한국고전번역원)

1290년 고려와 합단의 치악성 전투는 한국 전쟁사에서 기억해야 할 전투이다. 50기의 기병을 보병 6명이 기습하여 말 8필을 빼앗는가 하면, 단 6명의 고려군이 400명의 사나운 합단군을 습격하여 물리치고 적장과 적군 절반 이상을 사살한 그야말로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 버금가는 일당백의 전투였다. 원주에서 패한 합단은 기세가 꺽여 충주와 연기 전투에서 고려와 원의 연합군에 패하고 물러나게 된다. 세계 전쟁사에서도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의 황금씨족을 물리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전쟁이 끝나고 원충갑은 6단계를 뛰어넘는 초특급 승진을 하여 고려의 전쟁영웅이 되었고, 원주 주민들은 3년 동안 부역과 세금을 면제받게 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