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남 (사)한국걷는길연합 이사장.

'한 번도 안 가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다녀온 사람은 없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히말라야의 매력을 함축해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이 말의 진가를 알게 된 것은 2020년 2월 초순, 필자는 그해 9월 네팔의 포카라에서 개최 예정된 '2020년 세계걷기길컨퍼런스(WTC)'에 참가단을 인솔해야 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전국 걷기길 관련 관계자 30여 명을 안내해야 하는 중압감 때문에 코로나 팬데믹이 선포되기 직전 무리해서 사전 답사를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모든 중압감을 일거에 덮어버린 것은 '간두룩' 언덕에서 마주한 마차푸차레의 6,997m 봉우리였다. 장엄한 자태, 노년의 지혜처럼 덮인 정상의 만년설, 석양을 받아 금빛으로 물든 '물고기꼬리' 모습은 충격으로 남아 오래도록 가슴에 자주 그리움으로 떠오르곤 했다. 

2023년 코로나19 엔데믹 이후 가장 가고 싶은 그곳을 작년 12월 20일부터 올 1월 4일까지 다녀왔다. 나의 깊숙한 내면에 있는 그리움 섞인 갈증 때문이었으리라. 걷기동호인 60대 남녀 5명, 40~50대 여성 4명은 약간의 호기심 섞인 두려움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인솔자인 내게 '괜찮을까요?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다녀온 사람이 고산병으로 힘이 많이 들었다고 하던데….' 하며 위로와 장담을 주문했다. 

그러나 4,130m 고지에 두 발을 딛고 안나푸르나 1봉 해발 8,091m의 위용을 바라보고 난 뒤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되어있었다. 출발 전날까지 걱정에 잠을 설쳤다는 의경 씨. 약해진 무릎관절을 보호대로 감싸고 걸어야 했던 영은 씨, 3,700고지인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 언저리부터 손발이 감각이 무뎌지며 오심을 느꼈던 영선 씨, 남화 씨, 혜용 씨. 두통을 대수롭지 않은 듯 견디던 진호 선장은 물론이고 왕언니로 늘 씩씩한 인숙 씨, 오기 전부터 설렘으로 늘 발걸음 가볍던 승선 씨, 전생이 '야크'였을 거라고 웃음으로 응원하던 막내 민서 씨. 

▲ 최종남 이사장의 안니푸르나베이스캠프 인증 사진.

차고 메마른 히말라야 계곡 바람과 맑은 공기를 뚫고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을 맞고, 온기 없는 방에서 밤새 떨던 시간이었지만 피부와 눈빛은 윤이 나고 얼굴에는 평온과 미소가 가득했다. 무용담이나 자랑보다는 매일 매시간 매 순간을 진심 어린 요리사, 포터, 현지 안내자와 함께 기쁨을 만들고 행복을 만끽했다는 이야기로 쉴 틈이 없었다. 오죽하면 36년간 히말라야 트레킹을 안내하는 사티쉬 씨가 '처음 대한 한국인들인데 반은 웃고 말은 반밖에 안 하는 것 같다.'라고 놀라워할 정도였다. 

특별히 강한 체력을 타고나거나 힘들게 운동으로 다진 사람만이 갈 수 있을 것 같은 그 길이 이렇게 평범한 우리도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다만 무리한 일정(급하게 산행하고 목적지에서 인증샷 찍으면 서둘러 내려오는)을 피하고 절경을 만나러 가는 과정 자체가 또 다른 작은 여행이 되고 순간마다 별도의 즐거운 순간들로 이어간다면 피로와 고통스런 후유증을 남기지 않고 생태학적 신기성을 마음껏 누리는 도보여행이 되리라 믿는다. 

4,000m 고지에서 만난 9살 금발 소녀의 해맑은 웃음, 3천m 고지 오르막길에서 장난치며 길 가던 9살 11살 두 일본 어린 형제, 82세임에도 10번째 이곳을 찾았다는 동양 노인 3명을 떠올리며 원주의 치악산이 생각났다. 대한민국 명산 중의 하나인 치악산('악' 소리 나는 험준한 산)도 소수 등산애호가의 전유물이 아니고 전국이나 전 세계에서 도보여행을 오는 누구나 쉬엄쉬엄 올라가 감춰진 비경과 운해의 파노라마를 즐기며 동해에서 뜨는 해님과 눈을 맞추는 그런 코스로 활용되기를 희망해본다.

최종남 (사)한국걷는길연합 이사장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