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미산성 북문 터에서 바라본 원주 시가지.

원주 해미산성이 지난 12월 7일 열린 강원도 문화재위원회 문화재지정 심의회의에서 가결됐다. 2021년 처음 문화재 지정 신청서를 제출하고, 문화재 지정 심의과정에서 강원도의 자료 보완 요구에 따라 2022년 문화재지표조사와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고 3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해미산성 문화재 지정 신청은 필자가 퇴직 전 수행한 마지막 업무여서 감회가 새롭다. 

대체로 공직자가 수행하는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지만, 문화재 지정 업무는 더욱 어렵다. 도시에 남겨진 비지정 문화유산 중 빛이 가려진 숨은 문화재를 찾아내어 가치를 입증하여 까다로운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과하는 일은 고된 일이다. 지정문화재는 나라와 지역의 정체성이 담긴 문화유산으로 도시의 품격을 나타내는 지표이기도 하다. 관광도시로 이름난 국내외의 도시들 대부분은 지정문화재가 관광자원이 된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 행정직 공무원의 경우 문화재에 대한 중요성이나 보존의 필요성을 체감하지 못한다. 오히려 문화재로 지정되면 보존 관리와 활용에 대하여 전적으로 지자체에서 책임져야 할 일이기 때문에 문화재 지정에 대하여 대체로 부정적이다.

나라와 백성의 생명을 지키는 국방시설인 성은 설치 위치에 따라 평지성과 산성으로 구분한다. 나라의 도읍지와 지방의 크고 작은 도시 중심부에 세워진 읍성이 평지성에 해당되고, 험준한 산악지역에 설치하여 외적이 침입하여 위태로울 때 방어하는 성을 산성이라 한다. 평지성이 국왕과 백성, 주요 시설을 사람들이 거주하는 현지에서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산성은 나라의 전략적 요충지에 설치하여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시설이다. 축구와 농구 같은 스포츠로 비유하자면 산성을 운영하는 것은 대인 지역방어 전술이라 할 수 있다.

원주는 평지성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조선시대 문헌에도 '원주는 읍성이 없다.'라고 기록한 것을 보아 도시개발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원래 도시에 성을 설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주는 고대로부터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원주보다 규모가 작은 도시에도 읍성을 설치한 경우가 많은데 신라 오경 중 하나인 북원경과 강원감영의 치소가 있었던 원주 도심에 성을 설치하지 않은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연구자들은 원주에 읍성을 설치하지 않은 이유로 원주 도심과 가까운 거리에 치악산이 있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외적이 침입하면 평지보다 방어에 유리한 험준한 치악산의 산성으로 들어가 성을 지키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원주에는 모두 4개의 산성이 있다. 고대도시 북원경의 치소로 여겨지는 도심과 가까운 치악산에 3개소와, 후삼국시기 견훤의 근거지로 알려진 문막읍 궁촌리의 견훤산성이다. 특히 남북으로 길게 뻗어 산맥을 형성하고 있는 치악산은 자연 요새이다. 

고대로부터 한반도 중부지역에 위치한 원주와 치악산을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져 왔다. 치악산에 있는 3개의 산성은 모두 원주 도심에서 바라보이는 치악산 서쪽 가파른 산릉에 있다. 영원산성과 해미산성, 금두산성으로 불리는 치악산의 산성 중 도시와 가장 가까운 산성은 해미산성이다. 

영원산성은 2003년 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고, 고려시대 합단적의 침입과 두 차례의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해미산성과 금두산성은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고 알려진 전쟁 기록이 없어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산성이다. 해미산성에 대한 실체가 알려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1997년 산성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실측조사와 지표조사를 통해 규모와 축성 방식을 조사하고 지표에서 수집한 유물들로 성을 쌓은 시기를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조사는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맡았는데 조사결과 주목할 만한 것은 영원산성보다 해미산성이 더 이른 시기에 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신라 문무왕 때 치악산에 성을 쌓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영원산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1997년의 조사는 당시까지 통설 대신 해미산성이 신라가 쌓은 성일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하게 되었다. 조사 관계자들은 신라를 넘어 고구려의 축성 방식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1997년 처음 해미산성의 실체를 밝힌 조사의 공식 보고서는 '영원산성·해미산성 정밀지표조사 및 실측조사'였다. 당초계획은 영원산성을 대상으로 국비와 도비를 지원받았는데 용역기관을 충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선정한 후 당시 조사 단장인 차용걸 교수에게 해미산성을 함께 조사해 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드렸다. 이유는 해미산성은 비지정 문화재이기 때문에 조사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강원도지정 문화재인 영원산성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지원 받은 작은 예산으로 비지정 문화재인 해미산성 조사까지 부탁하니 조사기관으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차용걸 교수는 필자의 부탁을 수용하여 두 개의 산성 모두 조사하였다. 지금처럼 상업적인 발굴업자들은 상상하지 못할 결정이다.

26년 전 학술조사로 강원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도 충분하다는 결과를 얻었지만 그동안 해미산성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하였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2년여 동안 필자는 도시 외곽에 있는 비지정 문화재를 발굴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여 문화재로 지정하는 일에 매진하여 10건의 문화재를 지정하였는데, 필자의 노력이 해미산성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굳이 변명하자면 해미산성은 국립공원 내에 있기 때문에 도시개발이나 인위적인 훼손의 위험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뒤로 미루었다. 

2020년 퇴직이 가까워지자 해미산성이 떠올랐다. 그동안 몇몇 후배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일이 진척되지는 않았다. 사적인 자리에서 해미산성 이야기가 회자되었고 함께했던 원주시의회 곽문근 의원이 발 벗고 나섰다. 시민들과 해미산성 답사를 진행하고 의회에서 해미산성 문화재지정 건의문을 제안하였다. 나아가 2천여 명의 시민에게 서명받아 해미산성 문화재지정 건의문을 제출하기까지 했으니 파격적인 일이다. 

해미산성이 문화재로 지정되면 전적으로 판부면과 반곡동 주민, 이장님 그리고 원주시의회 곽문근 의원이 애쓴 결과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