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몰락, 감영 소재지 이점 사라지고 상대적 침체

 

▲ 원주군 읍내 약도(국가기록원 소장). 국가기록원은 제작연도를 1921년 전후로 추정.

지역 역사는 주민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긍심과 애향심을 고취한다고 흔히 말한다. 원주처럼 짧은 시기에 인구가 증가한 곳에서는 그 필요성과 효과는 한층 높아진다. 또한 과거와 현재를 잘 연결한다면, 지역사회를 이해하고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데도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20세기 역사는 당대와 연결되었으므로, 더욱 활발하게 연구하고 시민에게 그 성과를 알리는 노력이 중요하다. 잘 쓴 역사서는 건물 같은 비싼 하드웨어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실질가치가 높고 의의가 크다고 믿는다. 

이 책을 집필하면서 이용한 수천 건의 자료는 대부분 당시 신문기사이다. 제2차 사료로서 한계가 있지만, 이보다 지역사회의 변화상과 주민의 삶을 풍부하고 생생하게 전하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관청문서를 발굴하여 신문기사의 단점을 보완하고 기존 연구와 중복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래도 사실의 실증, 해석, 서술 등에서 부족한 점이 수두룩하지만, 독자는 물론 향후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배와 서구 근대문명의 수용이라는 상황 아래에서 역사적 대변화가 개시되었다. 원주 역시 전통사회가 식민지 상황에서 근대적인 것으로 변모해 나갔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고, 낡거나 새롭게 조성된 사회모순은 서로 얽혀서 심화하였다. 가혹한 식민지배 외에도 자연재해, 경제적 파국, 침략전쟁은 주민을 극단적인 고통과 절망 속으로 몰고 갔다. 그 결과와 영향은 심대하여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필자가 사회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식민지 시기 지역사회를 보는 관점은 '상대적 침체'와 '왜곡된 저발전'이다. 조선왕조가 무너지면서 원주는 강원도 감영 소재지라는 이점을 상실하고, 행정구역이 대폭 축소됨으로써 여러 면에서 위축과 침체를 피하기 어려웠다. 개항 이래 급속하였던 상품화폐경제 변화와 유통망 재편도 주요 원인이었다. 일제 식민지배의 근본 목적은 조선인 억압과 수탈에 있었으므로, 합리적이거나 정당한 근대제도의 수립과 운영은 기대할 수 없었다. 

1930년대 원주군 인구는 7만여 명으로 춘천·강릉보다 적어
1910년대 후반 신작로가 개통…오토바이·화물 자동차 운행

더욱이 일제는 식민지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 지역 간 불균등을 조장하는 식민정책을 구사하였다. 지배와 착취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지역에는 근대적 시설인 행정을 비롯하여 학교, 교통, 통신, 산업 등을 우선적이며 집중적으로 배치하였다. 서울과 개항장을 중심으로 한 각도 도청 소재지를 개발하였고, 일본인 지주와 상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을 중시하였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공업 중심지를 침략전쟁의 기지로 삼았다. 이런 정책에서 벗어난 지역은 근대문명과 거리가 멀었고, 상대적으로 침체를 면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해방운동의 역량과 발전의 잠재력을 축적하기 어려웠다. 

강원도 수부였던 원주도 평균적인 수준으로 전락하였다. 1930년대 전반 원주군의 인구는 약 7만 명으로 춘천, 강릉, 철원, 홍천 등지보다 적었고, 후반에는 삼척 등 신개발지에도 밀렸다. 거의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한 경제력도 비슷한 추세였고, 일시적이나마 시장거래 규모가 횡성보다 작기도 하였다. 1941년 원주공립농업학교가 최초의 중등학교로 개교하기 전에는 정식 중등교육기관이 없었다. 이때 공공병원이 설립됨으로써 의사 몇 명이 주민의 질병을 치료하던 열악한 사정이 일부나마 완화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 '대원주' 건설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철도 부설로 획기적 변화를 기대하였으나, 실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설사 식민지근대화와 발전이 진행되었다고 하여도, 지역주민의 삶은 여전하거나 오히려 침략전쟁에 강제동원을 피하지 못하였다. 이런 지역 소외, 상대적 침체, 왜곡된 저발전 상태는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1950년대 중반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신흥도시'가 되었어도 쉽게 극복하기 어려웠다. 

일제의 식민통치체제는 조선총독부를 정점으로 하여 중앙과 지방에 엄정하게 수립되었다. 그 권력은 주민의 주권과 동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헌병경찰과 경찰 같은 물리력이 본질이었다. 근대제도의 형식만을 빌려서 행정기관 외에 사법기관을 두었으나, 인권보호에 역행하거나 크게 미흡하였고, 지방의회 같은 것은 허울뿐인 자치기관으로 식민지배를 보조하였다. 

1914년과 17년 원주군 행정구역과 명칭을 연거푸 개편하였고, 면제(面制)를 강화하였어도, 행정력이 지배와 착취 정책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부족하였으므로, 동리 단위에서 주민 단체까지 동원하였다. 초기에는 조선인을 지방관리로 삼았으나, 1920년대 이후에는 말단 행정직까지 일본인으로 채워나갔다. 면장 등 관리 출신과 유지 중 여러 명은 도회, 읍·면협의회 회원, 일본인 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는 등 친일과 부일의 길을 걸었다. 

▲ 원주군면폐합에관한지도(국가기록원 자료)

원주가 일제의 식민정책상 발전에서 소외되었어도, 근대문명과 제도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1910년대 후반부터 신작로가 개통됨으로써 교통요지가 될 조건을 갖추어 나갔고, 오토바이와 승용차는 물론 정기 버스와 화물 자동차까지 운행되었다. 원주읍내를 곧게 관통하는 도로(현재 중앙로 일부)가 정비되었고, 1930년대 말에는 또 다른 길(현재 원일로 일부)이 뚫렸다. 이런 도로교통의 발달에는 강제로 주거지를 철거당하고 부역 노동을 하거나 벌금을 물어야 하였던 주민의 희생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섬강, 문막강, 남한강 수운이 가져다준 이점은 점차 소멸하였다. 원주읍내에는 전통 한옥이 화재 등으로 사라지고, 일본식 여관이나 조선식산은행 지점 청사 같은 서양식 건물이 도로변에 들어섰다. 일본인은 남산 기슭에 따로 모여 거주하면서 조선인을 차별하였다. 이로써 전통적인 도심경관이 변하였고, 감영의 숱한 건물과 도교적 조경이 파괴되었다. 근대문명의 상징인 전기와 전화가 1930년대에 가설되었지만, 이용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일본인 남산 기슭에 따로 거주…전통적인 도심경관에 변화

식민지농업체제 아래에서 논농사와 양잠이 확대되고, 새로운 농법과 품종이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농산물 생산량은 증대하였고, 상품화는 촉진되어 원주시장과 문막시장 등은 자못 활기찼다. 소, 닭, 토끼, 돼지 등 가축 사육이 활발해지는 모습이 엿보였다. 하지만 증산의 과실은 생산농민보다는 지주와 일제에게 돌아갔다. 지주가 소작료 인상과 가혹한 소작 조건으로 농민을 과도하게 착취하자, 오히려 일제가 농민 반발과 사회적 저항운동을 염려하여 지주를 압박하거나 달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일제도 증세와 공출 등으로 농민을 철저하게 수탈하였다. 산미증식이나 농촌진흥운동도 그 수단에 불과하였다. 지주소작제를 대폭 개편하거나 철폐하지 않는 이상, 주민의 70~80%에 달하던 소작농민은 빈곤과 기아를 면할 수 없었다. 부재지주가 농경지 상당 부분을 소유하였고, 원주에 살던 최대 지주는 고리대금업 등으로 축재한 일본인이었다.

조선인 지주들이 소수가 있었고, 그 일부는 상업 등으로 돈을 벌어 토지를 매입한 새로운 지주였다. 구매력이 거의 없던 농민을 대상으로 영업하던 대다수 상인도 행상이나 소상인을 면하기 어려웠고, 원주 상권은 중국인과 일본인 같은 외국인 상인에게 장악된 상태였다. 

지주와 상인 등 부유층과 일반 주민의 소득 및 재산 격차는 대단히 컸고, 최하층인 세궁민은 생계유지도 힘겨웠다. 이런 극단적 양극화 계급구조에 변혁이 일어나지 않으면, 인간적 삶의 유지는커녕 생존하기조차도 어려웠다. 사회발전도 지체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주민이 가장 많이 참여한 운동은 치악산 산림의 불하 저지 투쟁이었으나, 그 한계는 매우 뚜렷하였다. 

또한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사회주의나 민족주의 계열의 조직적 사회운동은 미약하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일제의 탄압은 혹독해졌으므로, 해방의 희망과 투쟁의지는 극소수 운동자의 가슴에만 간직되었을 뿐이었다. 1930년대 들어서 일제는 전시총동원체제를 구축하고 조선인의 황민화와 강제동원에 한층 더 광분하였다. 천황숭배, 신사참배, 창씨개명, 일본어 상용화 등으로 민족말살을 기도하는 한편 총후후원, 군국훈련, 헌금, 식량 수탈도 모자라 청장년을 강제로 전장과 광산으로 끌고나가 희생시켰다.

장영민 상지대 명예교수  wonjutoday@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