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자기에 나전칠기로 장식한 화병으로, 명칭은 도태당초문나전칠화병이다. 한국문화오천년 전시 때 세계 각국을 순회한 김봉룡 선생의 대표작품이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의 계획을 세우는 12월 중순이다. 새해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간절한 소망을 꿈꾼다. 그 소망은 개인적인 일도 있고 공적인 계획일 수도 있다. 필자는 원주에서 27년 동안 공직 생활을 하면서 이루지 못한 공적인 소망이 여럿 있다. 공교롭게도 필자가 이루지 못한 소망은 모두 근대문화유산 분야의 일이다. 그 중 하나는 올 한해 문화계에서 전국적인 쟁점이 되었던 아카데미극장을 보존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원주 칠공예의 뿌리인 옛 원주칠공예주식회사 건물을 보존하여 활용하는 일이었다. 

아카데미극장 보존은 건물매입까지 완료하였고, 옛 원주칠공예주식회사는 매입비 12억 원을  국비로 확보하였으니 필자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아카데미극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옛 원주칠공예주식회사 건물 매입은 소유자의 반대로 국비를 반납해야했으니 돌이켜 보면 참 안타까운 일이다. 원인을 따져보면 모두 필자의 노력과 재주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의 아쉬움은 더 크다.

굳이 외적인 요인을 하나 더 보탠다면 원주시민의 성향이다. 원주사회에는 지역의 역사와 고유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진 구성원이 많지 않다. 필자는 지역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의 크기는 애향심과 같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사적인 자리에서 시민들의 애향심을 거론하기를 즐겨하는데, 대부분 원주에서 태어나 대를 이어 살고 있는 토박이보다 외지에서 이사 온 이주민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필자와 함께 원주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주민이다. 필자처럼 원주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원주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원주에 대하여 더 큰 애정과 관심을 보인다. 아카데미극장과 옛 원주칠공예주식회사 보존에 큰 힘을 보태준 것도 대부분 그들이었다.       

다른 도시보다 우수한 천연자원이 원주에는 그리 많지 않다. 천연자원의 빈곤 속에서 원주의 칠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옻나무의 수액으로 빛나는 보석을 만드는 칠공예는 세계인에게 자랑할 만한 원주의 전통 무형유산이다. 질 좋은 칠과 수준 높은 장인들이 땀 흘려 작업하는 원주는 이제 통영과 함께 칠공예도시로 자리 매김하였고, 그 뿌리는 태장동의 옛 원주칠공예주식회사이다. 그러므로 옛 칠공예주식회사를 보존하고 활용하는 일은 족보를 지키는 일처럼 중요하다. 문화도시가 되려면 다른 도시와 차별화된 전통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일이 첫 번째 일이다.

필자는 요즘 틈나는 대로 프랑스의 박물관과 미술관의 누리집을 기웃거린다. 우리말 밖에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없으니 필자가 프랑스 박물관 누리집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필자가 하지 못한 오랜 숙제이니 큰 성과는 기대할 수 없지만 미룰 수는 없다. 다행인 것은 문명의 발달로 그 어려운 타국의 언어를 번역해 주는 기능이 있어 어눌한 재주를 책망하며 인터넷 탐색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필자가 프랑스 박물관 누리집을 방문하는 것은 원주 칠공예의 뿌리인 김봉룡 선생의 청년기 작품을 찾기 위해서이다. 김봉룡 선생은 23세 때인 1925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장식공예품박람회에 대화병을 출품하여 은상을 수상하였다.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 개최된 장식공예품 박람회는 문화예술 분야의 올림픽과 같은 국제 대회이다. 1936년 베를린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건 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지만, 그보다 앞서 김봉룡 선생이 파리 세계장식공예품박람회에서 은상을 받은 일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일제강점기 식민치하에서 이역만리 외국에서 개최되는 세계적인 공예작품 공모전에 참석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추측하건데 김봉룡 선생이 전성규 선생을 스승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926년 1월 17일 동아일보 기사 일부를 원문 그대로 옮긴다. 

"불라서 정부에서 일억 푸란의 경비를드려 개최한 만국미술공예품박람회에 조선 라뎐칠긔를 출품하엿다가 이번에 명예잇는 은패와 동패를 탄 두 조선 사람이 잇다. 이 명예 잇는 두 사람은 작년 이월에 본보에 소개한바 시내 삼청동에 사는 전성규 씨와 그의 뎨자 김봉룡 씨로 작년 오월부터 파리에 열린다는 전긔 박람회에 당국으로부터 출품하여 보는 것이 엇더하겟느냐하는 교섭을 받고는 숨어잇는 조선의 고유미술품을 세계에 자랑할 때는 이긔회라는 결심을 하고 고심참담한 끄테 겨우 약간의 자금을 어더 둘이 두 달 동안을 불면불휴의 정력을 다하야 화병(가격 구백원), 담배설합과 수합(가격 삼백원)의 세가지를 화병은 김봉룡씨 명의로 담배설합과 수합은 전성규 씨의 명의로 일본 상공성을 경유하야 박람회에 출품하엿든 것인데 진열되기는 일본관에 된 것이엇스나 세계에서 가장 미술의 감상이 고상한 꼿도회회라는 파리에서 만인의 칭찬을 바더 화병은 은패 수합과 담배설합은 동배의 명예상을 바덧다는 통지가 일본 상공성을 경유되야 총독부 상공과에 도착되자 상공과에서는 작일 오전에 이 사실을 발표하엿는데 이 박람회는 실로 전 세계의 공예품을 한곳에 모하 각국의 문화뎍 양식을 참작하여  불국 공예에 새긔원을 지흐려는 목뎍으로 열린 것으로 세게 각국의 공예품이 별가치 모혀든 중에서 조선에서 개인의 출품한 것이 입상한 것은 조선공예미술을 위하야 크게 경하할 바이라는 바 조선에서 출품된 것은 이밧게도 고려자긔 삼뎜 완초제편물 삼뎜도 이섯다더라"      

이 기사는 만국박람회가 열린 후 반년이 지난 다음해 1월에 보도된 것으로 우리 민족문화의 우수성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있다. 그러나 박람회가 끝나고 전성규, 김봉룡 선생이 출품한 작품은 운송비가 없어 그대로 파리에 남았다. 필자가 찾는 것은 바로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장식공예품박람회에 출품하여 은상을 받았던 화병이다. 화병 소장기관과 공동으로 김봉룡 선생의 유작을 옛 원주칠공예주식회사에서 전시하는 일, 필자가 이루지 못한 오랜 꿈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