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5년 미국 존슨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선물한 '공작무늬 서류 상자' 두 개 중 하나.

2011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김봉룡 선생의 도안은 한국 공예사에서 특별하고도 귀한 것이어서 박물관 수집품 중 완성된 작품만큼 소장 가치가 크다. 도안은 작품을 만들 때 기초가 된다. 건축에서 설계 도면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다른 공예와 달리 나전칠공예는 나전이라 불리는 조개껍질에 도안을 붙여 세밀하게 가공하기 때문에 도안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나전칠기 장인이 김봉룡 선생처럼 훌륭한 도안을 남긴 것은 아니다. 실례로 수많은 근대기 나전칠기 장인 중 김봉룡 선생과 몇몇 장인의 도안만 전할 뿐이다. 

나전 도안은 조개껍질을 오리는 밑그림이기 때문에 투과율이 높은 반투명의 얇은 종이에 그린다. 화선지에 그리는 수묵화나 채색화는 먹의 번짐이나 여백과 화려한 색채의 조화로 작품을 완성하지만, 도안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정교함이 생명이다. 세필로 그리는 나전도안은 선의 굵기가 일정해야 한다. 더구나 복사기가 없었던 시기 축소와 확대가 자유롭지 않아 모든 나전 도안은 실물 크기와 같아야 했다.

나전을 오려서 가공하고 칠하는 일이 숙련된 손 기능이라면, 기물에 따라 표면을 장식하는 나전의 문양을 결정하고 공간을 채우는 일은 그림 그리는 일과 같다. 도안을 그리는 일은 화가의 손과 공간을 구성하는 건축가의 머리가 필요한 창작 활동이다. 김봉룡 선생이 수 천장의 도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조선말 한국화의 대가 심전 안중식(1861~1919)으로부터 그림을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김봉룡 선생의 도안은 나전 문양뿐만 아니라 소목장에게 넘겨 가구를 만드는 가구 도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김봉룡 선생은 나전을 오려 붙이는 나전장에서 벗어나 최고의 가구 디자이너였다.

2011년 겨울 김옥환 님으로부터 나전 도안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이듬해 김봉룡 선생의 유품 일체를 우리 박물관으로 모셔왔다. 김봉룡 선생은 1994년 돌아가실 때까지 태장동에서 이조목기연구소를 설립하고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김봉룡 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생의 공방에 있던 유품들은 양평의 창고로 옮겨졌다. 김봉룡 선생은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김봉룡 선생의 공방을 물려받아 가업을 이은 자제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길건 짧건 무소유의 삶을 살다가는 성직자가 아니라면 보통 사람이 살다가 남긴 생의 편린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평생을 장인으로 살다 간 장인의 공방은 하나의 박물관이다. 특히 조선의 전통 나전칠공예를 이어받아 현대 한국 나전칠공예로 이어준 징검다리 역할을 한 김봉룡 선생의 공방은 근대 나전칠공예박물관이었다. 나전칠기와 제작에 필요한 옻칠과 여러 종류의 조개껍질, 나전장의 손길이 닿지 않은 백골, 도안을 그리는 세필과 나전을 가공하는 온갖 종류의 도구들, 오려진 나전과 미완성 작품들, 김봉룡 선생의 공방은 박물관이었다. 

다행인 것은 가족 중 아무도 선생의 가업을 이어 공방을 물려받지 않았지만 공방에 있던 김봉룡 선생의 유품은 고스란히 남았다. 유품이 남겨진 곳은 원주와 가까운 양평의 시골 마을 비닐 천막이었다. 그 유품들을 봉인 해제한 사람은 김옥환 님과 필자였다. 2012년 여름이었으니 김봉룡 선생이 돌아가시고 18년 만이었다. 유품들은 종류별로 종이상자에 담겨 있었는데 5평 남짓한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랜 세월에 먼지가 쌓이고 푸석푸석한 종이상자를 열어보니 선생이 쓰던 작업대가 보였다. 작업대를 살며시 들어 올리자 상판과 다리가 분리된다. 너무 오래 열악한 환경에서 보관된 까닭이다.

필자는 내용물 확인하는 일을 멈추고 김옥환 님께 말했다. 잘못 건드리면 훼손될 수 있으니 우선 안전하게 박물관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김옥환 님께서 동의하셨고, 며칠 뒤 18년 동안 양평의 개울가 비닐 천막에 있던 김봉룡 선생의 유품을 모두 우리 박물관으로 모셔왔다.  

직원들과 함께 종이상자를 열 때마다 탄성을 질렀다. 옻칠이 담겨 있는 칠 통을 열어 손으로 만져 보니 말랑말랑했다. 20여 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굳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먼지와 곰팡이에 빛을 잃은 수천 개의 오려진 나전 중 하나를 닦으니 영롱하게 빛났다.

김봉룡 선생의 유품을 모셔 오긴 했으나 큰 숙제가 남았다. 기증 처리하고 수장고에 입고하려면 건마다 먼지를 털어내고 수량을 파악하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 박물관에 유물이 들어오면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박물관 업무를 모르는 행정직 공직자들에게 필자는 '수장고에서 유물 관리하는 일은 동사무소의 주민등록 업무보다 훨씬 복잡하다'고 이야기한다. 한두 점도 아니고 수천 점에 이르는 유물을 한꺼번에 처리해야 하니 큰일이다.

기증 목록을 작성하고 유물 등록을 마치기도 전 전시회 준비를 시작했다. 한국 근대 칠공예의 역사를 되살리는 전시이고, 기증해주신 유족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사 김봉룡'이라는 주제로 열린 전시회에는 선생이 소년 시절 갓 일을 배우면서 만든 양태와 시계, 안경, 만년필 같은 소지품과 도안, 파리 만국장식품박람회에 출품해서 받은 상장, 존슨 대통령 방한 때 박정희 대통령이 선물한 나전 상자,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 여러나라에 알리기 위하여 기획한 '한국미술 오천년전'에 출품 되었던 화병 같은 나전칠기 작품이 전시되었다. 

김봉룡 선생의 유품과 작품에 더해 박원동 님이 소장하고 있던 원주칠공예 주식회사 현판과 사진도 전시했다. 전시 도록에서 필자는 '우수한 칠산지 원주가 고대 칠화칠기 부활의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일사 김봉룡 선생께서 몸담았던 원주 칠공예의 뿌리인 옛 원주칠공예주식회사 건물이 원주의 자랑으로 활용되길 소망한다'고 썼다. 

전시가 시작되고 문화재청에서 태장동 원주칠공예주식회사에 대한 실태 파악을 위하여 현장을 방문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필자는 문화재청 관계자들에게 태장동 칠공예주식회사 건물과 원주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일사 김봉룡' 전시를 설명해 주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칠공예주식회사에 대하여 보존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였고 3년 후 칠공예주식회사 매입비 12억 원을 지원해 주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