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12월 22일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일사 김봉룡 선생의 도안.

12월이 되면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아이들은 설레임에 부푼다. 다가올 크리스마스 선물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교회를 나가는 아이들이나 그렇지 않은 아이들 모두 빨간색 옷 입은 산타크로스 할아버지가 전해주는 선물에 대한 기대감의 크기는 같다. 장난꾸러기 아이들도 12월이 되면 착하고 선한 아들, 딸이 되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필자도 12월이 되면 필자가 받은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선물이 떠오른다. 

"박관장은 교회 나가세요?" 2011년 12월 이맘때이다. 기독교인으로 신앙심이 깊은 일사 김봉룡 선생의 장남 김옥환 님이 필자에게 물었다. "아니요. 저는 불교도라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불교 신자들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습니까!" "초등학교 때에 부모님께서 선물을 받은 적은 있습니다만 중학교 때부터 안 주시던걸요. 제가 선물 받을 만큼 착한 아들이 아니었나 봐요." "그래요. 그러면 제가 이번 크리스마스 때 작은 선물하나 보낼께요." 필자와 김옥환 님의 대화였다. 필자는 대전의 큰 교회 장로인 김옥환 님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의례적인 선물을 주시려는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김봉룡 선생을 뵙지 못한 필자가 선생의 장남 김옥환 님을 처음 만난 건 2011년 여름, 나전칠기의 고장 통영에서 열린 "통영 나전칠기, 회고와 전망"이라는 포럼에서였다. 처음 통영시로부터 포럼에서 발표해 달라는 요청받았을 때 필자는 칠공예 전공자도 아니고 필자가 근무하는 원주시청에는 칠공예를 담당하는 부서가 별도로 있다는 이유로 완곡하게 사양했다. 그런데 며칠 후 다른 사람을 통해서 포럼에 꼭 참석해 달라고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원주시청의 담당 팀장을 추천하며 사양했으나 포럼을 주관하는 통영시 관계자의 요청 또한 뜻을 굽히지 않아서 결국 수락하게 되었다. 

발표문을 작성하기 위하여 포럼을 주관하는 통영의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다른 도시의 칠공예 발전 속도에 비하여 칠공예 본고장 통영은 쇠퇴 되어 가는 것 같아서 포럼을 개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통영에서는 칠공예 분야 지원정책이 잘 이루어지는 도시로 원주를 생각하고 있었다. 필자를 포럼 발표자로 지목한 것은 원주에서 칠공예 장인들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장인들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는 공간 마련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선 일 때문이었다.

포럼은 통영 최대의 축제인 한산대첩제 기간인 8월 12일 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열렸다. 나전칠기의 본고장답게 포럼의 열기는 뜨거웠다. 학술 포럼임에도 불구하고 200여 명의 방청객이 객석을 채웠다. 원주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어서 필자는 놀랍고 부러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모두 5인의 발표 중 필자는 마지막으로 '원주의 옻칠공예의 특징과 육성시책'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필자의 발표 내용은 원주 옻나무의 우수성과 재배 현황, 원주시의 칠공예 육성시책, 원주의 칠공예 전통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중 핵심은 원주 칠공예는 통영이 고향인 일사 김봉룡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강조하였다. 더불어 통영은 나전칠기의 본고장이고 원주는 1970년 이후 원주에서 다시 시작된 칠화칠기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통영이 고향인 박경리 선생 기념사업을 두고 통영시와 원주시와 경쟁하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포럼의 발표와 토론이 끝나자 방청석에서 머리가 하얗게 센 노신사가 단상으로 올라와 필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발표 잘 들었어요. 제가 김봉룡 선생의 아들 김옥환입니다.' 필자는 크게 당황하기도 했지만 무척 반가웠다. 그동안 두어 차례 전화 통화만 했을 뿐 직접 만난 건 처음인데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만나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포럼 발표자와 토론자, 통영시 관계자들이 서로 인사하고 사진을 찍느라 번잡한 단상에서 김옥환 님은 귓속말로 필자에게 말했다. "원주 칠공예와 아버지 이야기 잘 들었어요. 아버지 작품이 원주에서 활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귀가 번쩍 뜨였다. 통영에서 김옥환 님과 짧은 만남이 근현대 한국 칠공예 거장의 작품과 유품을 고스란히 원주로 모셔 오게 되는 인연이 될 줄 아무도 몰랐다. 

통영에서 돌아온 필자는 바로 대전에 있는 김옥환 님을 만나러 갔다. 김옥환 님이 통영 포럼에서 필자에게 귀엣말로 이야기한 김봉룡 선생의 유작과 유품에 대한 활용 방안을 구체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옥환 님으로부터 아버지의 유작에 대한 소장 경위와 김봉룡 선생이 쓰셨던 유품에 대하여 말해주었고 필자는 활용 방안을 제안했다. 유작의 대부분은 교직에 계셨던 김옥환 님이 박봉을 아껴 시중에 떠돌던 것을 매입한 것이었으니 원주시역사박물관에서 매입하고 유품은 온전하게 원주에 기증해 달라고 당돌하게 제안했다.

김옥환 님은 필자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후 몇 차례 김옥환 님을 만나면서 김봉룡 선생의 작품을 실견하기도 하고, 김옥환 님과 함께 김봉룡 선생이 일했던 태장동 원주칠공예주식회사를 찾기도 했다. 사실 필자는 이때 원주칠공예주식회사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다. 그동안 칠공예에 대한 관심이 필자가 다루는 다른 업무에 비하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오래전 폐업하여 소유주가 바뀌어 있었지만 남아 있는 건물 2동은 여전히 건재했다. 건물 앞에서 숙연해 하는 김옥환 님과 옛 칠공예 주식회사 건물 활용에 대하여 논의하기도 했다. 

2011년 12월 22일 크리스마스를 사흘 앞두고 커다란 택배가 왔다. 라면 상자보다 큰 종이상자인데 힘주어 들어야 할 만큼 제법 무거웠다. 보낸이는 대전 김옥환 님이었고 받는이는 필자였다. 수취인이 필자이니 직원들은 개인 택배라 고 생각해 필자의 방으로 가져왔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보니 상자 가득 차곡차곡 쌓인 접힌 종이였다. 맨 위 종이를 펼쳐보니 도안이었다. 그동안 어디서도 보지 못한 김봉룡 선생이 가는 붓으로 그린 나전 도안이었다. 한두 장도 아니고 상자 안에는 크고 작은 도안 수백 장이 가득 차 있었다. 

도안을 한장 한장 살펴보는데 필자의 볼에 눈물이 흘렀다. 필자는 김옥환 님께 전화했다. "아니 이렇게 귀한 유품을 택배로 보내시다니요. 훼손이라도 되면 어쩌시려구요." 필자의 감사 인사는 한국 칠공예사의 역사적인 유물을 소홀하게 다룬 노신사를 엄중하게 꾸짖는 책망이었다. 전화를 마치고 동료 직원을 불러 도안을 전해주며 잘 관리하라고 말하자 그 직원 역시 놀라서 한참 동안 흥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