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톱으로 자개를 오리고 있는 김봉룡 선생. (사진: 원주역사박물관)

필자는 세계적인 나전칠공예의 거장이자 원주 칠공예의 뿌리인 일사 김봉룡(一砂 金奉龍, 1902~1994) 선생을 만난 적이 없다. 영월이 고향인 필자는 1995년부터 원주시 공무원으로 일했고, 김봉룡 선생은 1994년 돌아가셨으니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도록에 실린 작품이나 옛 사진으로만 보았던 필자에게 김봉룡 선생을 옆에서 대하듯 실감 나게 이야기해준 사람이 있었으니 선생의 큰아들 김옥환이었다. 

김옥환은 '김봉룡 하면 흰 두루마기와 흰 고무신, 온통 희게 센 머리,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 일렁거릴 듯한 길고 흰 수염을 늘어뜨린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이는 1970-80년대의 원주 길거리와 터미널에서도 자주 목격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이런 모습은 원주사람들에게 나전칠기 장인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김옥환의 소회는 필자뿐만 아니라 김봉룡 선생을 보지 못한 사람들도 선생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통영과 함께 원주가 옻칠공예 도시로 자리매김한 것은 1968년 원주칠공예주식회사에서 김봉룡 선생을 초빙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김봉룡 선생은 1902년 통영에서 태어나 20대에 국내외의 국제 공예품 경진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1967년에는 나전칠공예 분야 최초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장인으로 완숙의 경지에 오른 것이 66세 때이다. 

통영은 남해에 떠 있는 43개의 유인도와 527개의 무인도 등 570여 개의 섬을 거느리고 있어 경치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풍광이 아름다운 도시이다. 경치뿐만 아니라 전통공예와 문학, 음악, 미술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예술가들이 태어나고 활동한 도시이다.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알려진 김춘수, 박경리, 유치환, 유치진, 윤이상, 전혁림 같은 예술가들의 고향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인문 도시이고, 통영이 배출한 예술가들은 통영 사람들에게 자부심의 원천이 되는데 그 중 으뜸이 김봉룡 선생이었다.  

통영에서 전통공예가 잘 계승되고 발전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충청·전라·경상도의 삼도수군을 총괄하는 통제사의 지휘 본부인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면서부터이다. 조선시대의 군영에는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과 나라에 바치는 진상품, 생활용품을 만드는 공방을 운영했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조선 수군의 사령부 통제영에는 부채, 옻칠, 장석, 그림, 가죽, 철물, 목가구, 금은 제품, 갓, 자개 등을 다루는 12 공방이 있었다. 조선시대 통제영 12 공방의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갓일, 나전, 소목, 두석, 소반, 대발을 만드는 장인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아 활동하고 있다. 

조선의 공예 전통이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는 통영에서 태어난 일사 김봉룡 선생이 처음 배운 공예는 갓을 만드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남자들의 모자인 갓은 신분에 따라 쓰는 종류와 크기가 달랐는데, 대체로 햇빛을 가리는 창인 양태(凉太)와 머리에 쓰는 총모자를 결합한 형태이다. 갓 만드는 갓일도 양태를 만드는 양태장과 총모자를 만드는 총모자장, 양태와 모자를 결합하는 입자장으로 분업화되어 있다. 그중 김봉룡 선생은 말의 갈기와 꼬리털인 말총을 세밀하게 엮어 둥근 창을 만드는 양태 일을 배웠다. 김봉룡 선생은 1994년 원주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소년 시절 만든 양태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는데, 10살 때부터 어머니를 모시고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배운 갓 양태 만드는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 시절 갓의 양태 만드는 일을 배운 김봉룡 선생은 17세 때인 1918년 갓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당시 통영에서 크게 성행했던 나전칠기를 배우기 위하여 통영군청에서 운영하던 나전칠기 공방에서 일하게 된다. 그곳에서 당시 통영 나전칠기의 맥을 이어오던 명인 박정수 선생을 만나게 된다. 박정수 선생의 문하에서 나전칠기의 기초를 배운 김봉룡 선생은 1920년 새로운 스승 전성규 선생을 만나는데, 두 사람의 만남은 한국 나전칠 공예가 전통을 넘어 현대의 공예예술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전성규 선생은 서울의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조선시대의 전통과 관습이 남아 있었던 당시에 나전칠기와 같은 공예품 만드는 일은 천한 일이어서 양반이 할 일이 아니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나전칠기에 매료된 전성규 선생은 나전칠기의 본고장 통영으로 내려와 통영칠기주식회사를 운영하게 된다. 이때 김봉룡 선생은 통영칠기주식회사에 들어가 시대를 초월한 인물 전성규 선생의 제자가 된다.

1920년 김봉룡 선생은 스승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공예사에서 2년 동안 머물면서 일본에서 사용하는 금속세공용 실톱을 보고 나전칠기에 활용했다. 조선 나전칠기의 전통은 가위로 자개(조개 껍질)를 오려내었는데, 실톱을 사용하면서 정교한 가공과 자개를 여러 장 겹쳐서 같은 문양을 한꺼번에 오려낼 수 있었다. 이 방법은 우리 나전칠 공예의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에서 돌아온 전성규 선생은 서울 삼청동에 공방을 차리고 김봉룡 선생도 통영을 떠나 전성규 선생의 공방에서 일했다. 양반 가문 출신인 전성규 선생은 통영의 장인들과 달리 교류의 폭이 넓었다. 삼청동 공방은 전성규 선생의 친구들이 모이는 장소였고, 스승 덕분에 김봉룡 선생도 나전칠기를 떠나 시대를 앞서가는 지식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한국화의 대가인 심전 안중식을 만나 그림을 배우게 되는데, 훗날 김봉룡 선생이 수 천장에 이르는 세필로 그린 수준 높은 도안을 남길 수 있었던 바탕이 된다. 

1930년 김봉룡 선생은 스승의 공방에서 독립해 서울 가회동에서 고대미술나전칠기공예소를 설립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1934년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전성규 선생이 평안도 태천 나전칠공예소의 초대 교장으로 떠나자 전성규 선생으로부터 삼천동 공방을 물려받아 1950년대 까지 서울에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 통영으로 돌아온 김봉룡 선생은 교육사업에 관심이 컸던 스승의 길을 따라 1951년 통영나전칠기강습소에 강사로 근무하다가 1956년 경상남도나전칠기기술양성소 부소장에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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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수 전문기자(전 원주시 학예연구관)  wonjutoday@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