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매년 10월이 되면 어김없이 사랑받는 노래, 「잊혀진 계절」은 원주가 낳은 시인 박건호가 작사했고, 고수머리 가수 이용이 불러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1982년 가요대상을 받기도 했다.
시인의 꿈을 안고 올라간 작사가 박건호의 서울 생활은 암울하기만 했다. 한때 그에게 문학 소년을 좋아하던 여인이 있었지만 변변한 수입도 없었던 시인 박건호는 '사랑한다'는 고백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낙엽이 후두둑 떨어지던 가을밤, "헤어져야 한다, 헤어져야 한다"고 되뇌이며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면서 '오늘이 마지막이다'라는 생각 뿐, 헤어지자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여인은 술값을 계산하고 그를 버스에 태우지만 박건호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여인의 뒤를 쫒아간다. 한참을 달려 우산을 쓰고 걷고 있는 그녀의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간다. 하지만 그가 던진 한마디는 "헤어지자"는 말이 아니라 난생 처음 해보는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우산 속을 빠져나와 도망치듯 한참을 달렸고 이별이라는 말을 사랑으로 대신한 자신이 더욱 더 초라하고 원망스러웠다.
1978년 10월 31일, 청년 건호는 집으로 돌아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이렇게 탄생한 노랫말이 「잊혀진 계절」이고 그날 이후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1949년 흥업면 사제리 봉현마을에서 태어나 70~80년대 수많은 노랫말로 대중들의 슬픔과 기쁨을 노래했던 작사가 박건호는 부친이 사제초등학교 부지를 기증하는 등 인근에서 알아주는 지주의 집안에서 부유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신장염을 타고난 박건호의 병약함은 남보다 1년 늦게 중학생이 되어야 했고 늘 병원을 가까이 해야 했다.
 |
| ▲ 생전 박건호 선생 모습. |
그의 아버지는 6남매 중 장남인 건호를 위해 시내로 이사하고, 병원에 장기간 입원시키기도 했지만 완치란 불가능했다. 휴학을 하며 병상에 누운 소년 건호는 편지 한 장 써본 적이 없었지만 자신의 현실과 아픔을 표현하고픈 욕망을 글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긴 병상생활을 마치고 한 살 어린 동급생들과 활기를 되찾았을 즈음에 그에겐 커다란 시련이 닥쳤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부친이 운영하던 사업들도 부도가 나면서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 2019년까지 소초면 흥양리에서 「하루」 레스토랑을 운영했던 장녀 영희(69세) 씨는 "제 기억으로는 아마 아버지께서 그 당시에 제약회사와 관련된 사업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끼와 자신의 노력이 어우러져 그는 제법 시를 잘 쓰는 문학청년으로 동급생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지만 아버지의 사망으로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홀어머니에 6남매의 장남으로 대학에 진학해 문학세계를 성숙시키고 싶었던 그의 바람은 사치일 수밖에 없었다.
원주중학교를 거쳐 1969년 대성고등학교(13회)를 졸업한 청년 건호는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다. 그동안 자신의 노력들을 모아 세인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어렵사리 찾아간 미당 서정주 선생은 그의 시집에 선뜻 서문을 써주셨다. 그의 첫 시집 「영원의 디딤돌」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고 그는 다시 생활고에 묶여 학용품 배달 등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가수 박인희가 부른 「모닥불」(1972년)이 전국적인 방송망을 타면서 부터이다. 평소 박인희 씨의 노래에 매료되었던 그는 직접 그녀를 찾아가 자신의 첫 시집을 내밀었다. 그의 시집을 본 박인희 씨는 「모닥불」이란 시를 끄집어냈고 거기에 곡을 붙여 노래 「모닥불」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작사가 박건호는 그때부터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 히트곡이라면 그의 이름이 빠지는 노래가 없을 정도였다. 그의 유명세 만큼이나 상도 많이 주어졌다. 「잊혀진 계절」 「아! 대한민국」 「풀잎이슬」 등을 통해 8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가요제 시상식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1982년 작사부문 KBS가요대상, 1983년 KBS 제1회·2회 가사대상, 1985년 한국방송협회 아름다운 노래 대상 등은 그가 평범한 일상적인 언어를 새롭게 시적인 언어로 탄생시킨 3천여 점의 노랫말에 잘 나타나 있다. 노랫말 짓기에 여념이 없던 그는 자신을 돌보는데 소홀해졌고 지병인 신장염에 뇌졸중까지 겹쳐 병상에 누워야했다.
신장이식 수술과 뇌졸중 후 병상이 아닌 일상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소중한 의미가 되어 주었기에 잠시 병상을 딛고 일어선 순간에도 대전 엑스포 주제가, 「그날은」의 노랫말을 썼다. 전문 작사가로서 한길을 걸어온 그는 다시 활동을 재개하며 새로운 삶의 전환점에 서있었다. 그동안 우연히 접어들었던 노랫말 짓기를 잠시 옆으로 하고 소설을 써볼 계획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써 내려가고 싶은 그의 욕망이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내고 있었지만 2007년 12월 시인 박건호는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작사가 박건호가 아닌 작가 박건호의 탄생을 기다렸지만 진실된 이야기로 탄생될 그의 작품들을 아쉽게도 기다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저 말없이 믿음과 희망의 눈으로 지켜봐야 하는 희망을 빼앗긴 채 매년 10월이 되면 우리는 박건호를 기억해야 한다.
유창목 원인동 주민 wonjutoday@hanmail.net
"하루 8분만 해도 살 빠진다고…"
